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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가족까지 견제 장인도 표적(문민정부 5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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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가족까지 견제 장인도 표적(문민정부 5년:11)

입력
1998.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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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매형 “정치 손떼라” 충고에 “야심품고 나를 밀쳐내려한다” 갈등/YS­장인 잦은 獨對에 ‘독점적 위상’ 위기감… 3년간 왕래 끊어/이모부 4·11총선 공천신청도 “野에 반격 빌미” 이유 탈락시켜『처남, 이제 대선이 끝났으니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자.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미국에서 온 우리도 곧 돌아가겠다. 이제 아버님이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잘 하시기만 바라야지. 우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자』

『매형,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아버님이 하시는 일을 계속 돕겠습니다. 앞으로 5년동안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셔야 하는데, 시중의 생생한 여론을 누가 전달합니까. 그때 그때 옳고 그른 일을 말씀드려야죠. 그게 뭐 잘못입니까』

93년 1월 하순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오간 김현철(金賢哲)씨와 그의 큰 매형 이창해(李昌海)씨간의 설전내용이다. YS정권 출범후 가족들의 처신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이 자리에는 두사람 이외에 현철씨의 부인 김정현(金姃炫)씨와 형 은철(銀哲)씨 부부, 누나 혜영(惠英)·혜경(惠京)씨 부부, 여동생 혜숙(惠淑)씨 부부가 있었다. 한결같이 어두운 표정으로 현철씨의 정치의지를 걱정하거나 이창해씨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현철씨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이 예화는 현철씨가 대선 직후 정치에 관여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음을 웅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Q씨의 증언. 『대선 이후 현철씨가 정치에 발을 깊숙이 담그는 것에 대해 가장 부정적이었던 사람은 큰 누나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현철씨를 둘러싼 잡음과 부작용이 들릴 때마다 어른에게 얘기하고 본인에게도 「그러지 말라」고 여러차례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현철씨는 「매형이 정치적 야심을 품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나를 밀쳐내려는 것이 아니냐」며 꼬아서 받아들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유사한 오해로 여러차례 갈등을 빚었습니다』

정치에서 현철씨를 떼어 놓으려는 가족들의 시도는 그러나 번번이 허사로 돌아갔고, 동기(同氣)들은 속으로 끌탕만 쌓아갔다. 스스로 「정치 전문가」라 자처한 현철씨는 가족들의 충고를 매몰차게 물리쳤다. 「정치를 잘 모르면서」 「아마추어면서」라는 공론(空論)을 대며 귀를 막아버리기 일쑤였다.

이처럼 현철씨의 정치욕심엔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권력의 핵으로 진입하는 「틈」을 허용치 않았다. 다른 가족 구성원이 국정운영에 입을 보태거나,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기미만 보여도 차단막을 쳤다. 대통령의 아들 이전에 스스로를 「정치참모」로 자리매김했던 까닭이었다. 이는 현철씨가 「가족의 일탈로 아버지가 비난받는 일을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 배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현철씨가 「사고를 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그를 정치와 「별거」시키려 했다. 87년 대선직후 가족모임에서 『조그만 게, 니가 뭘 알아』라는 핀잔까지 주며 현철씨의 정치관여를 막으려 했던 그들은 92년 대선 직후에도 현철씨를 정치권밖에 주저 앉히려 했다.

하지만 현철씨는 수차례에 걸친 가족들의 만류와 반대를 뿌리치고 「문민정부의 황태자」로 입지를 다져 나갔다. 그는 권력 장악도를 높여가면서 다른 한편으론 친인척을 정치적으로 견제했다. 대표적인 표적은 장인인 김웅세(金雄世·롯데월드사장)씨.

사실 집권 후반기 3년여동안 왕래마저 끊게한 두사람 사이의 애증관계와 균열조짐은 정권출범 초부터 곳곳에서 드러났다. 주변 인사들로부터 사위에 대한 좋지않은 이야기를 심심찮게 접했던 김씨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현철이를 저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는 직언과 함께 몇차례 유학을 건의한 것이 첫번째 화근.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현철씨 입장에선 장인의 진언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매주 일요일 저녁 교회예배를 마친 뒤엔 김씨 집에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등 앙금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김씨를 청와대로 불러 들이거나 방배동 집으로 밤 미행(微行), 격의없이 얘기를 나누는 등 김씨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좋아했다. 89년 9월 당시 통일민주당내 YS조직인 「한국미래사회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의 후신)의 소장을 맡은 김씨가 전문경영인의 안목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워준 것에 대한 믿음이 그때까지도 식지 않은터라 더욱 그랬다.

그런만큼 김대통령은 사돈과의 만남에서 시중의 여론을 듣고 싶어했고, 국정현안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현철씨는 김대통령과 장인의 이런 만남이 이어지면서 내심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다고 주변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김대통령에게 여론을 수렴해 전달하고 국정과 관련된 각종 정보보고를 하면서 구축한 자신의 「독점적」 위상이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졌다는 것이다.

현철씨가 장인을 견제하는 첫번째 수단으로 택한 것은 자신의 정보망에 포착된 장인관련 소문들을 문제삼는 것이었다. 당시 재계 일각에서는 「YS보다 더 센 US(김웅세씨의 영문 이니셜)」 「금융가의 대부」 「제2의 이원조」라는 설(說)들이 돌아 다녔다. 현철씨는 장인에 관한 그런 소문들이 결국 아버지의 국정운영에 마이너스 효과를 미치게 된다는 점을 들어 김씨의 행동반경을 제약했다.

김사장과 현철씨의 갈등은 94년 5월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이던 김기섭(金己燮)씨 경질문제(시리즈 2회에서 상술)로 정점에 이른다. 이를 고비로 김씨는 사위문제에 관한한 「2선」으로 물러섰다. 이와 더불어 정권출범후 2년여동안 지속돼 온 YS와 김씨의 만남도 서서히 단절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김사장의 지인(知人) Z씨의 회고.

『김사장은 문민정부 내내 정체없이 떠도는 온갖 루머로 맘고생이 적지 않았습니다. 현철씨의 유학만 하더라도 딸과 사위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선의로 얘기했는데, 오해를 산 겁니다. 96년 4·11총선 직전 현철씨가 출마 움직임을 보일 때에도 제지하려고 했어요. 현철씨는 장인과 이런저런 충돌을 거치면서 급기야 YS와 김사장의 관계까지 멀게 했습니다』

「정권의 파수꾼」을 자처한 현철씨는 여타 친인척의 정치개입도 적극 차단했다. 가까운 친척 중에 민원성 부탁이 쇄도하거나 줄을 대려는 사람이 몰린다는 소문이 들릴 경우, 측근을 통해 『문제가 있을 지 모르니 잘 체크해 봐라』고 지시하는 등 단속의 그물망을 쳤다. 주변 인사들에게 『큰 매형이 한국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있다. 사위가 나서면 안되는데…』라며 직설적으로 불신감을 표하기도 했다.

현철씨 이모부인 도재영(都載榮·전 기아부회장)씨가 96년 4·11총선때 신한국당 공천(군위·칠곡)에서 탈락한 것도 그의 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공천 실무담당자였던 X씨의 말. 『「친인척이 공천을 받음으로써 아버님의 개혁프로그램이 야당의 반격소재가 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 현철씨가 내세운 반대논리였다』

YS정권 4년여동안 막후실세로 군림하다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 현철씨.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의 정을 권력의 톱니바퀴속에 묻어버리기도 했다.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갈 지난날을 반추하며 현철씨가 곱씹을 단상은 무엇일까.<홍희곤·김성호 기자>

◎현철씨 형제들 근황/모두 정치와 담쌓아/美 체류 형 94년 귀국/3자매 모두 美 거주

김영삼 전 대통령의 2남3녀 자녀들은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달려온 아버지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결코 순탄하다고 볼수 없는 세월을 보냈다. 현철씨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일부로 정치를 멀리하며 YS집권 동안에는 아예 정치와 담을 쌓고 지냈지만 마음고생은 누구 못지않았다는 얘기이다. 각자 맡은 바 생업에 열중해도 항상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보낸 5년이었다.

YS가 자신을 쏙 빼닮아 더욱 사랑했다는 현철씨는 현재 서울 구기동 자택에 칩거하면서 침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는 김 전 대통령 퇴임후 상도동을 서너차례 찾아 문안인사를 했으며 김 전 대통령도 가끔 아들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대하는 김 전 대통령의 태도도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현철씨에게 지난 5년이란 세월은 아물수없는 아픔으로 각인돼 있다고 한다. 간혹 가까운 사람들의 방문을 받긴 하지만 외부의 눈에 띌까봐 되도록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대통령 취임이후 일절 잡음을 내지 않고 보통사람으로 머물러 온 다른 형제들은 지금도 언론에 노출되기를 꺼린다. 현철씨의 형 은철씨는 지난 94년 미국 LA에서 무역업을 하던 중 『장손이 가업인 멸치어장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현재 서울 평창동에 살고 있다. 가끔씩 경남 거제를 찾는다고 한다.

현철씨의 누나 혜영·혜경씨 부부는 현재 미국 LA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고, 여동생 혜숙씨 부부는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그들의 마음 역시 편치는 않을 것 같다. 아버지의 실정과 동기의 국정농단이 남긴 멍에를 나누어질 수 밖에 없는 혈육들인 까닭이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회(4월6일자) 내용중 김기수(金起秀) 전 검찰총장 관련 부분에 대해 김 전총장은 『나는 현철씨 인맥이 아닐뿐더러 한보사건 수사결과를 현철씨에게 알려준 일이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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