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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철 원광대 교수 ‘한국학보’ 기고서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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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철 원광대 교수 ‘한국학보’ 기고서 밝혀

입력
1998.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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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150년이상 중국 일부 지배”/4세기말∼5세기초부터 遼西·晉平지역에 진출/660년 패망할때 뺏겨 中 역사서 ‘양직공도’에 기록『백제는 4세기말 5세기초에 랴오허(遼河) 서쪽 일대인 요서(遼西)지역과 양쯔(揚子)강 이남 진평(晉平)지역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요서는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패망할 때 돌궐과 말갈족에게 빼앗겼습니다. 진평은 언제까지 유지됐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소진철(蘇鎭轍·67) 원광대 객원교수는 최근 「한국학보」 제90집에 기고한 「양직공도(梁職貢圖)로 본 백제 무령왕의 강토」에서 백제가 늦어도 5세기초에서 7세기 후반까지 150년 이상 중국 북서부와 남부 일부를 영토로 지배했다고 밝혔다. 소교수는 우선 530년 양(梁)황제의 동생이 당시 중국에 온 35개국 사신의 모습을 그리고 해당국의 간단한 역사를 기록한 「양직공도」에 주목했다. 『이 그림역사책의 백제사신조(條)는 「진(晉)의 말기(4세기말 5세기초)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했고 낙랑도 요서·진평현을 차지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으니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했다」는 「송서(宋書)」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특히 「양서(梁書)」가 「백제도 요서·진평 2군을 두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낙랑이 백제를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백제 근초고왕의 사신이 진(晉)에 입조했을 때 황제가 근초고왕을 「낙랑태수」에 제수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소교수는 현대중국학자들의 지리학적 고증을 통해 요서는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와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사이 일대, 진평은 광시(廣西)성 좡족(壯族)자치구 일대로 추정했다. 좡족자치구에는 백제허(百濟墟·백제 옛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현지인들은 이를 「대백제」로 발음한다.

소교수는 「양직공도」에 나오는 사라(斯羅) 하침라(下枕羅)등 백제의 9개 「방소국(旁小國)」의 위치를 「일본서기(日本書紀)」 내용과 대조, 추정했다.

그에 따르면 사라는 신라, 하침라는 제주도를 말하는 것으로 신라는 5세기 초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것이다. 『방소국은 천자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봉국과 자주국의 중간쯤 되는 나라로 독자적 외교권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양서」에 「(신라는 본시) 작아서 스스로는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521년) 법흥왕이 처음 사신을 보냈는데 이 사신은 백제사신을 따라와 공물을 바쳤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무령왕대(501∼523) 또는 그 이전부터 백제의 방소국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교수는 『6세기초 무령왕의 강토는 왜로부터 중국의 요서와 진평을 거쳐 남방의 흑치국(黑齒國·동남아지역으로 추정)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과 한반도에 9개의 방소국을 거느린 제국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그동안 사료적 가치를 불신당해온 중국측 기록을 적극 활용한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이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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