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 거듭나야 할 까닭/“아직도 많은 ‘성역’ 金·權서 벗어나 사회와 인간에 대한 거시적 전망 담아야”30년이 넘는 군사정권 시절에 잊혀진 말이 있다. 신문, 그리고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무관(無冠)의 제왕」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신문에는 신성불가침의 「성역(聖域)」이 많다. 예를 들어 한국의 신문에는 법정의 판결에 대한 검증·비판이 없다. 물론 재판은 증거에 의해 확인된 「사실」과 법과 법관의 양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공개적 검증이 없다면 사회의 어느 분야, 어느 조직이건 권력남용과 부정부패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배심원들이 유죄·무죄를 평결하고, 법관은 그에 따라 형량을 선고하게 돼있다. 배심원제도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지만, 적어도 재판의 결과인 「판결」은 어느나라에서나 공개적인 검증·비판을 받아야 한다. 법정이 성역으로 남는다면 최근에야 들통난 의정부의 판사비리같은 부정부패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신문에 가장 대표적인 성역은 잘 알려진대로 정치권력이요 재벌이다. 폭력적 탄압이 사라진 소위 「문민시대」의 김영삼 정부도 과거 어느 군사정권보다도 완벽하게 신문을 충성스런 동반자로 만들었다. 그것이 김영삼 정부의 눈과 귀를 막고, 어이없는 오만을 낳아 정치적 파탄과 국가적 부도로 끝나리라는 사실을 김영삼 정부가 미처 예상치 못했을 뿐이다.
김영삼 정부시대는 그런 뜻에서 언론에 값비싼 경험과 교훈을 남겼다. 언론은 권력이나 금권(金權)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비판과 견제」라는 기본적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게다가 반세기만에 실현된 정권교체는 지금까지의 관행만으로는 풀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새로운 「눈」과 판단기준을 요구하는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대통령선거를 통해 성립된 연립여당과 국회의 총리인준권의 정치적 맥락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헌정사상 처음 제기된 이 문제는 언론이 적극 개입해서 민주원칙에 걸맞는 해법을 찾는 토론의 광장을 열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들은 연립여당과 한나라당을 싸잡아 「정치부재」를 비난하는 「양비론」으로 문제의 핵심을 비켜갔다.
재벌의 문제도 그렇다. 한국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재벌의 문제로 귀결된다. 김영삼 정부의 실패도 결국 재벌개혁의 포기가 원인이었다. 그 결과 「하나회 해체」나 금융실명제등 국민의 여망을 담았던 개혁도 이제는 「흘러간 노래」가 돼버렸다. 그런데도 신문들은 새로 들어선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외세」에 기댈뿐, 「금권의 성역」에 대해서는 방관자적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이제 국가적 파산위기와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상황은 우리가 끝내 실현하지 못했던 「원리·원칙」을 복원하고, 그동안의 잘못된 관행의 틀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기적 압력앞에서 우리는 먼저 언론, 특히 언론을 선도(先導)해야될 신문이 거듭나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신문은 잠에서 깨어나 각 분야 성역의 벽을 허무는 시도를 해야한다. 그래서 언론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권력과 금권을 주역으로 하는 정치·경제 중심 제작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주제에 다양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권력과 금권의 동반자노릇을 하면서 잊어버렸던 질높은 「고급언론」의 영역을 회복해야 한다. 사건을 신속·정확하게 보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역없는 심층보도와 국가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거시적 전망의 마당을 제공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론이 잘못을 반성하고, 공익을 대표하는 매체임을 다짐하는 것이다. 쇠붙이를 두들겨서 상품을 만드는 장사도,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권력기관도 아니라는 다짐이다. 그래서 신문기업의 공개, 편집의 자율성 확보, 몇몇 거대신문에 의한 세계에 유례없는 시장과점상태의 완화등 개혁과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시작했을 때 취재기자는 단 두사람이었다 한다. 서재필은 두사람이 가져온 자료로 기사와 논설을 쓰고, 주 3회 발행에 300부씩 찍었다. 그로부터 102년. 지금 신문은 뉴미디어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신문이 스스로 거듭난다면 지나간 100년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역사의 앞에 서서 나갈 것이 확실하다. 1998년의 「신문의 날」을 각별히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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