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실은 남편이다)이 15년동안 다니던 직장을 최근에 그만두게 되었다. 주위에서 걱정해주는 것은 좋은데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첫번째로 꺼내는 당부가 『남편 기를 살려주라』는 것이었다. 한 두번 들을때는 『음, 그러지 뭐』하고 생각했는데 횟수가 거듭되니 짜증이 났다. 우선 무엇이 기를 살려주는 것인지 모르겠어서 그랬고 내가 기를 살려주어야 할만큼 남편은 어린이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요즘 나라가 어렵다보니 유독 여성들한테 주문이 많다. 여성들은 어려워진 집안 살림을 부양할 줄 알아야 하고(억척스러워야 한다) 동시에 기가 죽은 남편을 부드럽게 감싸안아야 한다(나긋나긋해야 한다). 요컨대 만능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자 자신의 좌절감이나 고통은 하소연할 데도 없다.
더구나 직장인으로 일하다가 그만두어도 「갈 곳이 있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실업통계에도 안 잡히고 재취업희망자에도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 일하던 남자가 살림꾼으로 돌아서기 힘들듯이 일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게다가 탤런트와 모델로 활약하면서 돈까지 잘 버는 예쁘장한 여성들이 그렇게 살림도 잘하는 살림꾼이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져 평범한 여성들의 기를 죽인다.
여성학자들은 페미니즘의 부침이 경기와 상관있다고 진단한다. 호황일때는 여성을 일터로 보내려고 여성의 능력을 과장하고 불황일때는 현모양처를 미화한다고 한다. 그래서 신경정신과 전문의 최보문씨는 『기를 살려줘야 기가 사는 어른이라면 기를 살릴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한다. 어려운 시대, 여자나 남자나 스스로를 추스릴 줄 알아야지 불황의 정서적 완충역을 여성에게만 맡기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실직자의 아내들이여. 힘을 내라. 어려울 때 부부금실이 최고의 영약임을 알지만 남편의 기를 북돋우려 기쓸 필요 없다. 남편은 결코 어린이가 아니며 여성이 모든 고통을 흡수하지 않아도 된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행복은 결코 살림이 늘어나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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