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정권재창출 걸림돌 DR 등 제거목적 小山 작품”/逆음모론 “김광일 실장·안기부토착세력이 ‘小山게이트’로 몰아”. 김기수 총장 “YS가 덮으라고 말해 현철씨에 이야기 했다”김현철(金賢哲)씨의 몰락을 부른 한보 게이트와 관련해선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이른바 「음모론」. 정치권을 횡행했던 한보 음모론은 대단히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머리와 꼬리를 나누기도 간단찮을 뿐더러, 한때 인구에 회자(膾炙)됐던 깃털과 몸통 조차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나마 손쉬운 이해를 위해 뼈대를 추려본다면, 음모론과 역(逆)음모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먼저, 음모론의 배후에는 현철씨가 있다. 가장 유력하게 제시됐던 시나리오의 대강은 이렇다.
<현철씨를 중심으로 한 여권내 신주류가 노동법파동 국면을 탈출하기 위해 한보를 고의부도냈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97년 1월3일)와 그에 이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1월7일)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덮기 한보부도(1월23일)란 메가톤급 이슈를 끌어들인 것이다. 여기에는 정권재창출 과정의 걸림돌 제거라는 또다른 목적도 함께 담겨 있었다. 한보로부터 정치자금을 얻어 쓴 민주계 실세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이 계획했던 차기정권 창출구도를 구체화하려 했던 것이다.< p>현철씨를>
이 과정에서 첫번째 희생양으로 지목된 인물이 신한국당 홍인길(洪仁吉) 의원과 국민회의 권노갑(權魯甲) 의원이었다. 현철씨측은 YS에게 극비보고된 두 의원의 수뢰사실을 언론에 흘렸고(2월4일), 이어 신한국당 김덕룡(金德龍) 박종웅(朴鍾雄) 박성범(朴成範) 의원과 문정수(文正秀) 부산시장의 선거자금 수수사실도 언론에 유출(2월10일)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깃털일 뿐』이라는 홍의원의 「하소연」이 알려지면서 「몸통」의 정체가 전 언론과 국민의 관심사가 돼버린 것이다. 여기에 G남성클리닉 원장 박경식(朴慶植)씨의 현철씨 관련 폭로가 터지면서 한보 게이트는 「소산(小山)게이트」로 급선회했고, 현철씨 등 신주류는 정국주도권을 상실하게 됐다>
이 시나리오에는 그러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몇군데 있다. 우선 한보부도의 고의성 여부. 시나리오는 현철씨 인맥인 신주류의 이석채(李錫采) 청와대경제수석이 한보부도를 주도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수석이 과연 경제외적 논리로 한보부도를 「밀어붙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게다가 청와대 수석비서관 출신 Q씨의 증언은 알려진 것과 다른 점이 적지 않다.
『97년 1월 중순 들어 이수석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2차례 정도 한보사태 관련보고를 했습니다.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가급적 살리는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는 요지였습니다. 그런데 부도나기 이틀전쯤부터 「아무래도 부도나겠다」며 이수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보를 살리기 위해 정태수(鄭泰守) 총회장에게 「채권은행단에 주식을 담보로 맡기라」고 통보했는데, 정회장이 나타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부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정회장을 불러냈는데, 이번에는 은행단이 거부해버렸습니다. 이수석으로선 불가항력이었던 셈입니다』
「블랙리스트」 유출배경도 논리적으로 납득키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다. 민주계 대선주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김덕룡의원을 직접 겨냥했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상도동과 동교동의 금고지기였던 홍·권의원이 먼저 당했다. 시선교란용으로 보기엔 홍·권의원은 지나치게 「거물급」이었다. 두사람은 천하가 다 아는 YS와 DJ의 그림자이자 수족이었다. 오히려 음모가 있었다면, 두사람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짓기 위한 장막뒤의 작업이 있었을 개연성이 더 높다. 이어지는 Q씨의 이야기도 후자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김기수(金起秀) 검찰총장이 정태수 회장의 진술내용을 YS에게 보고한 것은 2월4일이었습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문종수(文鐘洙) 민정수석과 김광일(金光一) 비서실장을 건너뛴 채 YS에게 직접보고했습니다. YS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 그냥 덮으라」고 김총장에게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김총장은 현철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김총장은 현철씨 추천으로 검찰총장이 된 소산 인맥으로, 주요문제를 수시로 협의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2월5일자 아침신문에 유독 두사람의 수뢰사실만 보도됐습니다. 이 과정에 정치권이 개입했다면, 홍·권의원을 희생양 삼기 위한 「검은 손」의 작용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탕할 겁니다』
김총장은 나중에 가까운 지인에게 『대통령이 덮으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해 현철씨에게 이야기했다. 대통령에게 「그래선 안된다」고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현철씨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당시 상황을 털어 놓았다. 동기야 어찌됐건 같은 「보고」를 현철씨에게도 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이것이 현철씨의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보게이트 수사 책임자였던 최병국(崔炳國) 대검중수부장이 전격경질(3월21일)되면서 한 「폭탄발언」은 어느모로 보나 여권핵심을 겨냥한 흔적이 짙다. 그는 『한보수사가 실패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수사도중 번번이 기밀이 새나갔기 때문이다. (기밀유출은) 정치권의 암투에 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음모론과 대척점(對蹠点)에 있는 역음모론의 주인공은 청와대와 안기부내의 반(反)소산세력이다. 시나리오는 이렇다. <김광일 비서실장이 현철씨를 제거하기 위해 「현철이도 조사하라」는 ys의 발언을 언론에 흘렸다. 이바람에 현철씨는 꼼짝없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됐고, 이는 결국 구속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또 현철씨와 김기섭(金己燮) 안기부 운영차장 등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토착세력이 현철씨의 비리에 대한 온갖 설과 의혹을 그럴듯한 증빙자료와 함께 증권가와 언론계에 풀어놓아 소산게이트의 그물망에 가두었다>김광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나리오는 반은 틀렸고, 반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우선 김광일실장 관련부분. 김실장은 YS에게 『진상을 밝히는 차원에서 김소장이 조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 좋다. 김소장이 야당의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해 놓은 게 있으므로 고소인 자격으로 검찰에 출두하면 된다』고 건의했다. YS는 이를 받아들여 2월14일 검찰에 현철씨를 조사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청와대의 기류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검찰은 이날 아침 출입기자들에게 『현철씨 조사는 없다』고 말했다가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부랴부랴 『현철씨를 조사하게 될 것』이라고 「정정발표」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이날밤 김실장은 친구사이인 모신문사 주필을 만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YS의 검찰조사 지시사실을 「발설」하게 된다. 이 내용이 다음날 아침신문에 대서특필됐고, 자신에 대한 조사지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현철씨는 YS에게 항의전화를 하게 된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X씨의 증언.
『2월15일 새벽 현철씨가 청와대로 전화를 했습니다. 다짜고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는데,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 지시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런 일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현철씨는 화가나면 대통령에게도 소리지르며 달려드는 성격입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YS도 그런 현철씨를 겁냈습니다. YS의 발뺌으로 결국 김실장이 뒤집어 쓰게 됐습니다』
안기부의 「조직적 반란」은 안기부 업무의 속성상 사실확인이 어려운 부분이다. 물증이 동반된 「공작 당사자」의 직접증언이 아니고선 진위여부를 판별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이 부분은 음모론의 실체적 전모와 함께 미궁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현철씨와 김기섭씨 등의 안기부 사물화(私物化)에 대해 안기부 토착세력이 대단한 반감을 가졌던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보사태를 둘러싼 음모론과 역음모론은 그 실체가 무엇이건, 관련 당사자 모두를 참담한 공동의 패배자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사의 오점이자 비극으로 남게 됐다.<홍희곤·김성호 기자>홍희곤·김성호>
◎‘음모론’ 실체는/김덕룡 의원 첫 제기/“특정系 명단만 유출” “다 끝난일” 언급 회피
음모론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김덕룡 의원이었다. 김의원은 97년 2월10일 자신의 5,000만원 수수보도 관련 기자회견을 통해 『도대체 무슨 장난과 음모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검은배후」를 겨냥했다. 그는 2월12일 당무회의에선 『나를 음해하고 당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타격을 가하겠다는 세력이 있다면 분명히 맞서 싸울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김의원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한보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사실이 확인된, 검찰소환 조사 이틀뒤(4월14일) 가진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선 현철씨를 직접 겨냥, 『밀실에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왔고 심지어 차기정권까지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어 내겠다는 헛된 꿈을 꾼 세력』이라고 공격했다.
김의원은 당시 상황 취재를 위한 몇차례의 인터뷰 요청에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고 거절했다. 다만 김의원의 측근은 『음모론을 제기한 몇가지 정황증거가 있었다. 당시에는 음모가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흥분상태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데…. 실체는 지금도 모른다』고 여운을 남겼다.
한보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당했던 민주계의 한 의원은 『증거가 없어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정황으로 봐선 음모가능성이 높다. 신한국당 대선주자 경선을 앞두고 특정인 혹은 특정인과 가까운 사람의 명단만 흘러나간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다 끝난 상황에서 따져봐야 아무런 실익이 없다. 물증없이 심증만 가지고 이야기 해봐야 감정만 상한다』며 더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역음모론의 배후당사자중 한명으로 몰렸던 한 인사는 『홍인길·권노갑씨의 명단유출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으나, 그이상의 대(大)음모론은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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