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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방 20여일 소설가 황석영(한국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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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방 20여일 소설가 황석영(한국인터뷰)

입력
1998.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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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문학의 성실성으로 메울터”/‘東道西器 아닌 西道東器’/현실에서 한걸음씩 먼저 가며 그 내용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겠다는 것이 내 구상/역시 기본은 글쓰기지만 체질적으로 ‘딴따라’니까 영화 등 다른 장르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소설가 황석영(黃晳暎)씨는 후배작가들이 그를 일러 「우리 시대의 일물(一物)」이라 말하듯, 한 사람의 작가이기를 넘어 시대와 사회의 한 상징이 된 존재다. 가석방으로 출옥한지 20여일. 그의 행보는 신중하지만 문단 안팎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문학과 문화, 통일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요즘 생각을 들어보았다. 그는 방북과 해외체류등 10년동안의 「외도」경험은 환갑이 될 무렵 자전형식으로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옥독(獄毒)은 빠지고 「시차」 적응도 잘 되십니까.

『아직도 사람이 많은 곳에 가거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엄두가 나질 않아요. 장기구금자들이 흔히 겪는 가벼운 신경증이라더군요. 서울도 많이 변했고 예전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곳에 가면 반갑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생활은 무척 변한 것같아요.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대체로 건강하다는 진단이었습니다. 글쎄…한번 여행을 다녀오면 어떨는지. 밤이 되면 삭막한 느낌이 들더군요. 목로술집도 썰렁하고』 (그는 『택시를 탔더니 알아보고 요금을 받지 않는 기사도 있었다』고 말했다. 익살은 여전했다. 차를 주문할 때 굳이 먼저 시키라고 권하더니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그러면 「건강도 생각 않나」고 할까봐 상대가 녹차를 시키면 나도 녹차를 시킨다』고 설명하며 웃는다).

­구상중인 작품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소설을 쓰지 않은지 벌써 10년째입니다. 방북 전에 단편 몇 편 썼을뿐이니까요. 그러나 기나긴 망명과 투옥생활동안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지 않은 적이 없어요.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대충의 형식에 관한 디자인이나 주제라든가 내용이라든가의 뼈대는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종래의 리얼리즘의 틀을 발전적으로 해체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오래 되었어요. 베를린에서 우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있었고 세계의 변화를 목격하며 당시의 인터뷰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요. 「현실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지 않고 한 걸음씩 먼저 가면서 그 내용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겠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습니다.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한 걸음만 앞서 가겠다는 것은 지금 바로 이 자리를 토대로 하면서도 가까운 장래까지 포괄한다는 소리지요. 문제는 동아시아적 형식인데, 모든 그릇은 원래 그것에 담길 물질의 성질에 따라 결정되었지요. 동아시아의 전설, 민담, 무속, 연희의 전위적 형식과 그 속에 풀려서 자연스럽게 반영된 생활체계는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소중한 보물창고와 같지요.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서도동기(西道東器)라고나 할까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문화적 공세 가운데서 자신의 개성을 보편화할 수 있는 길이면서, 일제시대부터 해방이후 지금까지의 한국문학의 리얼리즘을 풍부화, 다양화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래의 전형성, 총체성보다는 산문에서의 시적인 메타포나 상징, 함축성이 강조돼야 할 것입니다』

­다른 장르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시겠군요.

『70, 80년대에 연극이나 마당극 대본도 많이 썼는데요, 영화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있지요. 소설에 관한 생각과 마찬가지의 계획을 몇 가지 세워두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양식이 영화장르와 맞아 떨어지는 소재가 있다면 해볼 생각입니다. 저는 원래 소설가이기보다는 체질적으로 「딴따라」였으니까요. 기본은 역시 글쓰기가 되겠지만』(그는 감옥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 공연비디오를 보고 젊은이들의 문화창조력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옥중에서도 작품을 많이 읽어 90년대문학을 훤히 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훤하게 꿸 정도로 널리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간간이 동료들이 넣어주는 창작집이나 잡지를 꾸준히 보긴 했지요. 밖에서 보니 유럽문학에 어떤 유행적인 사조나 흐름이 획일적으로 휩쓸고 다니지는 않고, 우선 다양하지요. 아니 어떤 면에서 그들은 제3세계의 예술에서 자양분을 얻고 있었어요. 80년대의 뜨거운 「불의 축제」는 사실은 6월항쟁 뒤의 가난한 터전 위에 뒤늦게 온 것이었고, 잇달아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일종의 사상적 공황이 뒤를 이었지요. 냉전이 그쳤다지만 여전히 분단체제는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는데도 거의가 「새로움」에 떼거리로 몰려가거나 지레 질려버렸지요. 몇몇은 제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변화에 올바르게 대응하지 못했거든요. 철이 지나면 옷을 갈아 입으면 되는 겁니다. 이 세기말의 혼란 가운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건가는 남들이 결정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IMF, 출판계 몰락등으로 침체에 빠진 한국문학의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이겠습니까.

『원래 위대한 문학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언제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금융시스템, 그리고 할리우드는 미국 세계체제의 새로운 힘이지요. 사회주의경제권의 붕괴로 북은 세계로 나갈 통로를 잃어버린 미아가 되었고, 남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재편성기간에 적응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난 몇년동안의 잔치란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드디어는 생쥐와 호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유예된 가상현실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와 밥을 짓고 고통스런 오늘을 살며 비로소 작은 즐거움들이며 이룰 수 있는 가까운 희망에 마음을 돌립니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요. 이제부터 민족문학은 현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사람들의 내면과 자의식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다양하고 풍부해져야 할 것입니다』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몇 마디로 줄여서 말할 수 없는 문제인데요…. 아시아문화로서의 한국문화가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 있기는 한가요? 할리우드와 미국식 소비문화가 대중을 완전히 점령했고, 우리 것은 호사가들의 골동으로 잔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살아 남으면서 세계라는 숲 속의 한 화원을 이룰 것인가. 저는 대밭을 생각합니다. 원래 대밭은 한 그루의 모죽(母竹)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 대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데, 뿌리의 마디마다 죽순이 새로 올라옵니다. 그 죽순들은 이듬해까지 어머니대나무와 같은 크기로 자라지요. 또 제각각 생명의 뜻에 따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죽순을 내밀게 됩니다. 각각의 대나무는 별개로 서 있으나 땅 속에서는 뿌리끼리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는 지진이 일어나면 대밭으로 피난한다지요. 숲의 생태계는 생존경쟁이 치열한데 일단 대숲이 형성되면 그 안에는 풀 한 포기도 들어오지 못한답니다. 저는 다음 세기의 우리를 생각할 때면 구주공동체와는 다른 동아시아문화권을 생각하게 됩니다. 분단문제도 마땅히 그 안에서 해소해야 되겠지요』

­통일문제나 방북활동에 대한 소신도 밝혀줄 수 있습니까.

『편향은 극복돼야만 합니다. 저의 방북활동은 80년 광주항쟁 이래 진행된 남한 진보세력의 치열한 전위적 운동의 표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광주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87대선은 좌절하고 민주화운동진영은 분산된 데서 온 일종의 좌편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추(錘)는 평형을 찾기 마련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친해지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떻습니까, 수천만 가운데 작가로서 저같은 존재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잃어버린 작가로서의 10년은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제 문학의 성실성으로 메울 작정입니다』

­고은(高銀)씨로부터 「귀석(歸石)」이라는 호를 받으셨는데요.

『투옥 5년동안 고은선생이 늘 잊지 않고 옥바라지를 해주었어요. 정말 가형(家兄)과도 같았지요. 그래, 석방되기 얼마 전에 나는 옛날식으로 그에게 정표를 한 셈이지요. 죽을 때 가지고 가게 호나 하나 지어 보내시라고. 두 가지를 지어 보내셨는데 귀석(歸石)과 염산(念山)이었지요. 우선 귀석을 쓰기로 했고 염산은 이 다음에 쓸 작정입니다. 먼 길을 떠났던 나그네가 해지고 때묻은 도포와 다 찢어진 갓을 쓴 차림으로 지팡이 짚고 서서 동구 밖에서 고향집을 바라봅니다. 퇴락한 사립문 저쪽에는 홀살이에 지친 가난한 아내와 머리에 서리앉은 노모가 마당을 오가는 것이 희끗희끗 보입니다. 그는 동네로 들어가기 전에 동구의 서낭당 돌무더기에 길가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 툭 던집니다. 이것이 「귀석」의 그림입니다』

­「장길산(張吉山)」으로 친숙한 한국일보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요즘 어느 사진가가 보내온 문인들의 사진집을 받고 거기 실린 제 낡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84년, 「장길산」을 끝내고 책으로 묶어내면서 벌인 출판기념회 겸 「장길산 초혼굿」에서의 사진이었지요. 그 얼굴은 반쯤 울먹이면서 김금화 큰무당님의 공수를 듣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이제서야 그때 그 자리에서 무슨 응답을 했는지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었지요. 「나는 언젠가 통일된 산하에서 그대가 살고 죽은 북녘땅을 찾아가리라」고 주절주절 넋두리를 했더랬습니다. 아! 그 말을 잊고 있었다니…그게 벌써 14년 전의 일인 것을.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여러분 앞에 제가 서 있습니다』<하종오 기자>

◎황석영은 누구

1943년 중국 창춘(長春) 출생

62년 경복고 재학중 단편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

문학상 수상

64년 숭실대 철학과 입학. 막노동·행자생활

66년 해병대 입대, 67년 월남파병

70년 단편 「탑」, 희곡 「환영(幻影)의 돛」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국대 철학과 졸

74년 창작집 「객지」 출간, 7월부터 대하소설 「장길산」

한국일보 연재.

자유실천문인 협의회 간사

78년 창작집 「가객」출간, 민중문화연구소 창설

80년 희곡집「장산곶매」, 장편 「어둠의 자식들」 출간

84년 「장길산」연재 종료, 전10권 출간.

민중문 화운동연합 대표

85년 장편 「무기의 그늘」(1부) 출간,광주항쟁 르포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간후 구속

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

89년 3월 방북, 이후 독일체류. 방북기「사람이 살고

있었네」 발표. 「무기의 그늘」로 제4회 만해문학상

수상

91년 미국 이주

93년 4월27일 귀국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수감

95년 「장길산」개정판 출간

98년 3월13일 사면으로 가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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