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비서실장 내정’ 현철측 제동/YS,95년 8월 집권후반기 개혁박차 구상 DR에 “도와달라”/‘小山 공조직추진’ 보도되자 이원종 DR 소행 몰아 “없던일로”/“기획참모” 영역 충돌 DR현철 ‘유학건의’로 결정적 반목95년 8월 초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민자당 김덕룡(金德龍· 현 한나라당 의원, 이하 DR)의원을 급히 찾았다. 시내 모처에서 외부인사를 만나고 있던 DR는 YS의 긴급호출에 다소 긴장한 채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섰다. YS는 DR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임기말에 접어드는데 김실장(YS는 야당총재시절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낸 DR를 이렇게 불렀다)이 들어와서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당시 한승수(韓昇洙) 대통령비서실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뜻이었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난 8월 하순 서울시내 모 음식점. 이원종(李源宗) 청와대정무수석이 수석실 직원들과 저녁회식을 하고 있었다. 술이 몇순배 돌자 한 비서관이 안주삼아 청와대비서실 개편소문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어른께서 비서실을 개편하려는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에는 DR가 유력한 것 같습니다』 이수석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DR비서실장 내정」에 소리없이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다시 일주일쯤 뒤인 8월28일. 모 조간신문에 「김현철씨 공조직 추진, 기존 사조직 법인형태 전환」이란 기사가 1면 사이드 톱에 오른다. 『대통령 차남인 현철씨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동안 비공개리에 활동을 해왔으나 오히려 악성소문이 나돌고 심지어 그의 막후활동이 민심이반의 원인으로까지 지적되자 당당하게 활동하려는 뜻에서 지금까지 운영해온 사조직을 공조직으로 전환할 방침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20일 넘게 진행된 DR비서실장임명을 위한 물밑작업을, 「있지도 않았던 일」로 만들어버린 「오보」였다.
시간을 거슬러 다시 회식자리. 이원종수석은 수하 비서관의 이야기를 접할 때까지 YS의 비서실 개편추진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부하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섭섭하다.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른이) 그럴 수 있느냐. DR도 그렇지, 그만큼 했으면 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이 소식은 두말할 것 없이 현철씨에게 즉각 전달됐다. 현철씨도 전혀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청와대 돌아가는 사정을 손금 들여다 보듯했던 두 사람이 몰랐던 일을 「일개」 비서관이 포착했던 저간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청와대비서관 출신 Q씨의 설명.
『YS는 집권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을 더욱 확실히 밀어붙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DR를 비서실장에 앉히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DR와 현철씨의 불편한 관계를 알고 있던 대통령은 현철씨는 물론, 누구에게도 언질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DR는 고심 끝에 비서실장직을 수락하기로 하고, 청와대내 자신의 인맥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청와대 사정을 파악하게 됩니다. DR의 동선(動線)을 누구보다 잘 꿰뚫었던 그중 한 명이 회식자리에서 그만 「말 실수」를 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현철씨 관련 신문보도와 DR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계속되는 Q씨의 이야기. 『현철씨 쪽에선 보도의 배후로 DR진영을 지목했습니다. 그렇잖아도 「DR비서실장」 추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이원종수석은 「DR측에서 있지도 않은 일을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려 현철씨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한다」고 펄펄 뛰었습니다. 이수석 입장에선 같은 상도동가신 출신에다 경복고 2년 후배인 DR가 비서실장직에 앉으면 자신의 입지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소외감까지 겹친 상태였으니 흥분할만 했습니다. 현철씨도 YS에게 직설적으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결국 이 일로 「DR비서실장」은 물건너 가게 됩니다』
다소 과정이 복잡한 이 예화는 김현철(金賢哲)씨와 민주계간의 숨겨진 애증사(愛憎史)중 「증」에 해당하는 챕터다. 「증」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DR이다. 현철씨와 DR의 갈등은 92년 대선과정에까지 그 뿌리가 닿아 있다. 현철씨가 등장하기 전까지 YS의 최측근 참모는 누가 뭐라해도 DR였다. 원외에 있으면서도 3선급 대우를 받았을 정도로 그에 대한 YS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러나 DR는 막상 92년 대선에선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전 같으면 응당 DR가 맡았어야 할 1급 정치참모역은 현철씨 몫이었다. 보완재라기보다 대체재에 가까웠던 두사람의 영역충돌은 어차피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현철씨와 DR의 관계가 벌어진 결정적 계기는 DR의 「유학발언」이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보름전쯤인 93년 2월초순 상도동에서 YS와 독대한 DR는 YS의 가족문제를 거론했다. 「대통령 취임전에 가족을 정리해 말썽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 상도동 자택은 사업하는 장남(은철·恩哲)이 지키면서 거제도 멸치어장을 가업으로 잇는 모습을 보이는 게 옳겠다. 현철씨는 되도록 유학을 보내고, 나머지 가족들도 어른과 떨어져 있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였다. 이 이야기가 현철씨 귀에 들어갔다. 가뜩이나 대선뒤 DR에 관한 좋지 않은 정보보고가 속속 올라오고 있던 터여서 현철씨는 단단히 심사가 상했다. 상도동비서출신 Z씨의 증언.
『그렇잖아도 현철씨가 DR를 벼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대선 끝난뒤 DR가 어른 돕는 것을 소홀히 한 채 자신의 향후 정치입지만 다지려 한다는 보고가 여기저기서 들어왔습니다. 정보보고중에는 특히 돈문제와 사조직에 관한 것이 많았습니다. DR가 「포스트 YS」를 노리고 일찌감치 뛴다는 것이었죠. 대선때 현철씨가 관리했던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 청년사업단 멤버들이 대선후 가끔씩 모임을 갖는 자리에서 DR를 공개성토하기도 했습니다』 DR의 현철씨 관련 직언은 그뒤에도 두번 더 있었다. 93년 5월과 8월이었다. DR는 이번에는 현철씨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비선조직으로 정국을 운영하면 안된다. 공조직을 이용해야 한다. 비선조직이 꼭 필요하다면 청와대내에 태스크 포스를 만들면 된다」는 게 그 골자였다. 비선조직이란 현철씨 중심의 사조직을 지칭한 것이었다.
현철씨와 마찰을 빚던 DR는 결국 93년 12월21일 개각때 정무1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바로 며칠전 YS로부터 「재신임」을 받은 그로선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DR는 개각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YS를 독대했다. 한완상(韓完相) 통일부총리와 이인제(李仁濟) 노동장관 등 개혁성향 각료들이 경질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DR는 자신도 이번 기회에 함께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차피 퇴진할 바에야 이들과 한묶음으로 물러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이 적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YS는 『쓸데없는 생각말라』며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청와대를 물러나온 DR는 개각 당일 아침까지 자신의 경질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YS의 결심번복 배경에 현철씨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보다못한 민주계 인사들이 몇차례 화해 자리를 주선했지만 현철씨와 DR의 관계는 번번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현철씨의 장인인 김웅세(金雄世·롯데월드 사장)씨까지 나서 만취 술자리를 가지기도 했지만 별무효과였다. 이들은 DR에게는 『만나서 풀어라. 인정할 것은 인정해라』고 조언했고, 현철씨에게는 『잘못 전달된 부분이 많다. 오해를 풀어라』고 충고했다. 화해를 주선했던 인사중 한명은 『막상 두사람이 만나면 별 문제가 없었다. 당사자들보다는 주변이 더 문제였다. 한마디 던지면 부풀려서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뒤틀려 돌아오는 악순환이 되풀이 됐다』고, 꼬이기만 했던 두사람의 관계를 설명했다.
92년 대선직후부터 단속(斷續)적으로 전개됐던 양자간 파워게임은 97년초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죽느냐사느냐의 서바이벌 게임으로 바뀌게 되고, 정국 역시 「음모론」과 「역음모론」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태풍권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홍희곤·김성호 기자>홍희곤·김성호>
◎민주계 가신들과 小山/처지따라 “친소원근”/최형우·서석재 “원만”/DR과는 잦은 충돌
민주계 가신들과 현철씨의 애증사는 소산(小山)의 막후정치를 들여다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상도동 가신들은 각자가 처한 위치와 시기에 따라 현철씨와 친소원근(親疎遠近)의 교직관계를 형성했다. 상도동은 원래 측근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었다. 야당시절에는 김동영(金東英) 최형우(崔炯佑) 서석재(徐錫宰) 김덕룡씨가 4대축을 이루었다. 「거창불곰」 김동영씨가 작고(91년 8월)한 뒤에는 현철씨가 그의 공백을 메웠다.
현철씨는 그러나 4각(角)중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현철씨는 다른 참모들이 가질 수 없었던 독특한 역할공간을 확보했다. 그는 객관적 데이터와 여론조사란 새 기법으로 YS를 보좌했다. 이 부분은 과거 참모들이 하지 못했던 기능이었다. 현철씨가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 상도동 캠프에는 DR이외에는 뛰어난 이론가나 탁월한 브레인이 없었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목청높여 노(NO)를 외칠 지사형 참모도 없었다. 이 역할을 현철씨가 했다. 그가 부자관계를 뛰어넘어 YS와 정치적 동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연유였다.
최형우씨와 서석재씨가 조직참모로서 서로 경쟁했다면, 현철씨와 김덕룡씨는 기획참모로서 역할이 중첩됐다. 최씨와 서씨가 현철씨와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던 반면, 현철씨와 DR가 부단히 부딪쳤던 것은 이런 함수관계 때문이었다. 서씨는 자기색깔 없이 YS를 모셨기 때문에 현철씨로선 「아저씨」라고 부를만큼 가장 편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였다. 반면 최씨는 현철씨를 「현실」로 인정했다. 측근들끼리 서로 가까웠던만큼 현철씨 「활용」도 비교적 손쉬웠다. DR와 차기경쟁을 하면서도 그는 DR와 달리 현철씨와 정례독대를 할만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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