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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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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8)

입력
1998.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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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뒤에 小山 있다” 소문 줄이어/민방·케이블TV 선정부터 휴게소·신호 등 교체까지 개입說/PCS 선정때 소문 극에 달해,비자금관리 의혹 그룹에 사업권/民放 허가땐 주무장관이 “큰일 났다” 보고… YS,현철 호통93년 3월 초순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일식집 주차장. 어둠이 깔리면서 검정색 고급 승용차 대여섯대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김덕영(金德永) 두양그룹 회장, 신영환(申泳煥) 신성그룹 회장, 최승진(崔勝軫) 우성건설 부사장 등 경복고 출신 기업인들이었다.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축하 모임에 참석하는 터이니 그럴만도 했다. 곧이어 김현철(金賢哲)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철씨 도착과 동시에 「경복고 동문」 술자리가 시작됐다. 주흥이 무르익어 갈 즈음 김덕영씨가 현철씨에게 말했다. 『대통령께서도 정치자금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김소장도 재벌로부터 절대 돈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라. 대신 기업하는 우리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지원하겠다. 김소장 활동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현철씨 입장에선 그저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날 모임은 애당초 「잘못된 만남」 이었다.

청와대비서관 출신 Q씨의 이야기. 『현철씨와 재계의 커넥션은 어쩌면 「순수한 동기」 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약조(約條)는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마약처럼 현철씨를 망가뜨려 갔습니다. 어차피 대가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 는 부탁 등을 현철씨에게 꺼내놓게 됐던 것입니다』

현철씨는 같은해 4월부터 96년 1월까지 김회장 등 경복고 기업인 3명에게서 매월 6,000만원씩 받았다. 돈을 전달하는 방식은 현철씨가 식사나 술자리 도중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대화에 열중해 있는 틈을 이용해 수표가 들어있는 봉투를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슬쩍 넣어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현철씨 주변인사 중에는 『동문들의 도움으로 현철씨가 더 큰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재벌 2,3세들의 모임인 「푸른회」회원 출신으로 청와대비서관을 지낸 Z씨가 대표적인 경우다. Z씨의 주장.

『현철씨는 재벌을 싫어했고 기업인에게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집권 초반기 현철씨가 가깝게 지낸 사람중에는 재계인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여기저기서 돈을 받긴 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더라도 기준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아군이냐 적군이냐」가 잣대였습니다. 이를테면 「야당에 정치자금을 대주는 기업에 민방을 허가해 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청와대비서관 출신 Y씨는 현철씨와 정보근(鄭譜根) 한보 회장과의 관계를 사례로 들며 Z씨의 주장에 동조했다. 『현철씨가 정회장을 몇번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마다 정회장은 「현철씨가 기분 나쁘게 대하더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정회장은 「현철이와 친하다」는 소문을 주변에 마구 흘리고 다녔습니다. 문제있는 기업인들이 현철씨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헛소문을 마구 퍼뜨리는 바람에 의혹이 눈덩이처럼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한보의 몇몇 고위간부가 「현철씨와 한보가 가깝다」는 소문을 흘리고 다니다 청와대로 불려가 혼쭐이 나기도 했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문민정부가 남발한 각종 인허가 사업이었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허가사업을 단기간에 해치웠으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핵심 실세들이 「이왕이면 우리가 (정권을) 잡았을 때 해주자」며 무리를 했다. 한국적인 정치풍토에서 허가를 따려는 기업과 기업인들이 권력핵심으로 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문민정부의 2인자였던 현철씨가 이 그물을 피해갈 순 없었다. 현철씨를 향한 줄대기 현상은 재계의 핫이슈였던 민방과 케이블TV, 개인휴대통신(PCS)등 대형사업의 허가를 둘러싼 로비전으로 극명하게 표출됐다. 하다못해 고속도로 휴게소나 교통신호등 교체사업에 이르기까지. 이권이 걸린 데마다 배후에 소산(小山)이 있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가히 「김현철 증후군」이라고 불릴만 했다.

현철씨의 이권개입 소문은 PCS사업자 선정(96년 6월)을 전후해 극에 달했다. 『현철이가 ○○기업을 민다더라』『XX기업은 현철이를 놓치고, 대신 민주계 실세 ○○○를 잡았다더라』는 등 노골적인 설(說)들이 판을 쳤다. 그중에서도 현철씨 인맥인 이석채(李錫采) 정통부장관이 주도한 PCS사업자 선정에 얽힌 의혹은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PCS 의혹의 요지는 이장관 취임직후 사업권이 당초 2개에서 3개로 갑자기 늘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한솔측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느냐는 것. 당시 한솔측은 『재계에 사업권을 하나만 주면 통신장비를 생산하는 「빅4」업체가 서비스사업까지 장악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면서 『재계에 배정되는 사업권을 장비생산 기업군과 그렇지 않은 기업군으로 각각 나눠 1개씩 허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종심사 결과, 사업권은 자동배정된 한국통신과 LG(장비 생산업체) 한솔(장비 미생산업체)로 낙착됐다. 한솔은 조동만(趙東晩) 부사장이 현철씨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아 당시에도 짙은 의혹을 받았다. 또 하나의 의혹은 서류심사에서 앞선 삼성이 마지막 청문심사에서 0점을 받아 만점(100점)을 받은 LG에 막판에서 밀린 대목이다. 한승헌(韓勝憲) 감사원장 서리는 지난달 21일 PCS특감과 관련,『이전장관이 전임장관때 정한 사업의 기본방침을 변경하고 최종 사업자 선정방법과 평가방식, 심사위원 선정등에 직접 개입했으며, 객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민방허가(94년 9월)를 둘러싼 잡음도 만만치 않았다. 오인환(吳隣煥) 전 공보처장관의 증언은 당시의 상황을 웅변하고 있다.

『사실 난다 긴다하는 사람들의 외압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공정하게 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라고 둘러댄 뒤, 정작 심사때에는 여러 갈래의 안전판을 만들어 놓고 누구도 장난을 못치게 했습니다. 심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어느날 현철씨를 지칭한 민방로비 관련 언론보도를 접하고 곧장 청와대로 달려갔습니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이것은 방송이기 이전에 언론입니다. 잘못되면 엄청난 문제가 발생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대통령이 현철씨를 불러 호통을 쳤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현철씨는 지난해 2월 한보사태 전까지 이권개입의 대가든, 순수한 활동비 명목이든 여러 기업인들로부터 수십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95년 6월에는 자신의 중학동 사무실에서 K기업 회장으로부터 『6·27지방선거 활동비에 보태 써달라』면서 10억여원을 받아 챙기기도 했다. 현철씨는 이렇게 야금야금 조성한 비자금을 은밀하게 관리해왔다. 문민정부가 최대의 업적으로 내세웠던 금융실명제를 정면으로 위반하면서.

민주계 핵심인사 R씨의 증언. 『현철씨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지 두달뒤인 93년 10월 대호건설 부사장 이성호(李晟豪)씨에게 50억여원이 입금된 통장 2개를 주면서 돈세탁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부사장이 「못하겠다」면서 하룻만에 도로 가져왔습니다. 이씨는 그러나 나중에 현철씨로부터 50억원의 관리와 실명전환을 다시 부탁받고는 이를 잠시 증권계좌에 넣어두었다가 전액 현금으로 인출했습니다. 그는 이 돈을 사과상자에 담은 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신의 집에 6개월동안 보관했습니다』 현철씨가 이씨와 김기섭(金己燮) 전 안기부 운영차장 등을 통해 관리한 비자금만 해도 120억여원. 그러나 그많은 의혹에 비하면 이 돈은 그리 큰 액수가 아닐는지 모른다. 현철씨의 이권개입 의혹은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으로 남아있다.<홍희곤·김성호 기자>

◎문민정부 이권사업/굵직한 인허가 남발/민방·케이블TV·PCS/ 황금알이 천덕꾸러기로

문민정부가 남발한 이권사업은 새정부가 들어선 현재까지도 여전히 미로속을 헤매고 있다. 문민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출구가 보이지않는 3대 이권사업은 지역민방, 케이블TV, 개인휴대통신(PCS). 이들 사업은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재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으나 불과 3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황금알을 삼키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95년 3월1일 「뉴미디어의 총아」라는 소리를 들으며 첫방송에 들어간 케이블TV는 현재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난달 5일 부도처리된 다솜방송의 사례가 보여주듯, 대부분의 업체가 부도직전의 심각한 경영위기에 처했다. 95년 5월 1차 개국한 4개지역 민방 등 전국의 8개 민방도 광고판매율 급감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부처간의 협조부족과 정부의 치밀한 정책부재가 케이블TV 및 민방의 부실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특히 민방의 경우 방송여건을 감안하지 않은 채 정치논리로 무더기 허가를 내준 것부터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PCS사업에 대한 문제점도 서서히 노출되고 있다. 정통부의 한 관계자는 『국내 인구수를 감안할 때 휴대폰 사업자 2개에다 PCS사업자 3개는 너무 많은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PCS사업을 하려면 1개 사업체당 대략 1조5,000억원이 투자돼야 한다』면서 『PCS사업체가 2개에서 3개로 늘어난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판단미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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