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폭동’서 ‘민중의 수난’으로/독재와 이념의 족쇄에 반세기간 묻혔던 비극/‘부패한 체제에 항거’로 부활,명예회복 나서/새 정부 전향적 태도 힘입어 올해 ‘4·3해결 원년’ 선언「조선의 모스크바에서 발발한 공산 무장폭동」.
1948년 4월3일 제주에서 발생한 4·3사건을 바라보는 당시 우익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이다. 이 때문에 유채꽃이 눈부셨던 제주에서는 「빨갱이」를 토벌하기 위한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이 감행됐고 그 와중에 무고한 양민들이 수없이 학살당했다. 그로부터 수십년, 무심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4·3에 대한 논의는 「빨갱이사냥」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재단(裁斷)에 의해 금단의 땅 저편에 갇혀 있었다. 권위적 억압적 독재정권의 위세에 눌려 목놓아 울 수도, 드러내 말할 수도 없었던 4·3에 대한 진상규명은 철저하게 금기시돼 왔다.
지난 달 28일 성균관대에서 「4·3 학술심포지엄」이 성대하게 개최된 것은 그래서 획기적이고 중요한 진전으로 볼 수 있다. 제주 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회 범국민위원회(상임대표 김찬국·金燦國 등 4명)가 주최한 심포지엄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개된 토론의 장에서 50년만에 다시 부각된 4·3은 더 이상 「공산 무장폭동」식의 단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낙인을 거부하고 있다. 민중운동에 관한연구를 계속해온 정해구(丁海龜·한국정치연구회 위원)씨는 『4·3은 당시 미군정 및 경찰의 횡포에 저항했던 민중항쟁 또는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이라고 전제하고 『공산폭동이라는 이유로 면제됐던 미군정과 경찰, 우익청년단체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김순태(金淳泰) 방송대 교수(법학)는 4·3 당시 발효된 계엄령의 불법성을 적시하고 『4·3은 결국 제도적 차원의 불법적 학살』이라고 규정했다. 의학적 차원에서 접근한 황상익(黃尙翼) 서울대 교수(의학)는 수집된 학살사례의 분석을 통해 『4·3은 집단광기속의 민중의 수난』이라며 『4·3을 통해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해 온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명림(朴明林) 고려대 교수(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실장)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사적 사실의 발굴과 규명』이라며 『이 문제를 국회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50년전 「남로당원이 계획적으로 사주한 폭동」이었던 4·3이 「부패한 국가체제에 대해 반발하고 나선 민중항쟁」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4·3의 재평가와 진상규명은 이데올로기적 측면보다는 50년이 지나도록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는 무고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위로에 중심이 두어져야 한다는 의견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4·3에 대한 재평가가 가능해진 가장 큰 배경은 민주화의 진전과 김대중(金大中) 정권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87년 대선때부터 4·3사건의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김대중 대통령은 정권교체후 4·3 관련문서의 공개를 약속하는 등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87년 6월의 민주화항쟁을 계기로 4·3을 처음 공론화한 후 꾸준히 세력을 모아 지난해 정식으로 발족한 범국민위원회는 올해를 제주 4·3의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위한 원년으로 선포했다. 또 최근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4·3의 피해자와 유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회내 진상규명특위를 설치하는 한편 정부차원의 보상을 실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어 4·3의 진상규명작업은 더욱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50년동안 억눌려져 온 4·3에 관한 논의는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김철훈 기자>김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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