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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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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7)

입력
1998.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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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움켜쥔 현철 “1人 안기부”/안기부·군·검찰·경찰 등 모든정보 집중 “국정전반 입김”/‘정보파이프’ 김기섭씨 민주계 실세 겨냥 왜곡된 정보 양산/인사정보도 입맛에 맞게 요리… 끝내 YS 눈과 귀 멀게해『공식적인 업무협조를 제외하곤, 200여명에 이르는 안기부 정보관(조정관)의 기관이나 단체출입을 일절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93년 3월초 김덕(金悳·현 한나라당의원) 안기부장이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안기부 기구개편안을 보고하고 있었다. 문민정부 초대 안기부장으로「안기부의 정치사찰 폐지」를 골자로 하는 안기부 개혁방향을 밝히는 자리였다. 김부장의 안기부 개혁의지는 혁명적이라 할만 했다. 반면 30여년동안의 관행이 몸에 배어있는 안기부 직원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정보수집은 어디까지나 비노출 간접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절대로 거부감을 줘서는 안된다』 그가 추진하려는 개혁의 기본골자였다. 김부장은 청와대 보고 뒤 이를 즉각 실행에 옮겼다. 행동지침과 함께 기관담당 요원들에게 각 기관에 대한 「출입금지령」이 하달됐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안기부 직원들의 내부반발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당시 상황에 대한 김씨 자신의 설명.

『안기부가 국민일반에게 나쁜 이미지를 주게 된 것은 국내 정치공작에 개입한다는 오해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과거에 어느 정도로 개입했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런 비판이 엄존한 것이 사실이어서 비판의 소지를 아예 차단하려 했던 겁니다. 안기부의 바람직하지 않은 기능을 정비하는 것이 정보기관 정상화의 일환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사찰 곡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위를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일선 안기부직원의 얘기는 다르다. 정당출입 경력이 있는 Z씨의 주장.

『집권세력이 안기부의 기능을 잘못 이해한 겁니다. 안기부를 너무 부정일색으로 본 것입니다. 대통령은 비서실 안기부 군 경찰등 다양한 공식채널을 통해 정보를 보고받아야 합니다. 공식채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는 안기부로부터 나옵니다. 문제는 그전 정권들이 이를 악용했다는 것입니다. 문민정부 출범직후 안기부는 무력감에 빠지고, 심지어 정권에 대한 배반감을 갖는 경우마저 있었습니다. 꽁꽁 묶어놓고 움직일 공간을 주지 않는데, 어디가서 고급정보를 얻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김부장의 엄명은 「약발」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기관출입을 공식적으로 허가한 적이 없었는데도, 정당과 재벌등을 담당하는 기관요원들은 슬금슬금 「출입처」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결국 1년정도 지난 뒤, 기관출입 금지령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기부의 내부 동요는 쉽게 사그라 들지 않았다. 이는 결국 YS정권의 몰락을 가져오는 「부메랑」으로 작용했다. 민주계 핵심인사 Q씨의 증언.

『국정운영을 위해선 조직마다 「세포」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신경처럼 퍼져있던 안기부 조정관들이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런 신경줄이 싸그리 걷혀 버렸습니다. 안기부가 복지부동하게 됐고, 자연히 정보의 흐름이 차단돼 버렸습니다. 국정의 중추조직이 질적으로 변해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문민정부가 안기부의 「정치사찰」 기능을 한때 포기했다고 해서 정치관련 정보수집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청와대 내에서 이런 역할을 공개적으로 해보자는 계획이 은밀하게 추진됐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예산과 인원 노하우 등의 부족으로 이내 벽에 부딪치고 만다. 그리고 이는 김현철(金賢哲)씨가 YS에 대한 정보보고의 공백기를 파고 들 수 있었던 배경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이어지는 Q씨의 이야기.

『국정과 관련된 정보유통의 공백을 현철씨가 정보보고 형식으로 대신했습니다. 안기부가 과거에 했던 역할을 현철씨가 대신하게 된 겁니다. 사실 YS는 아들이 국정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철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YS는 공조직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보는 사용권자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조직도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되죠』

YS가 가장 신뢰한 정보는 바로 현철씨로부터 나왔다. 안기부는 물론 군 검찰 경찰 등에서 나오는 모든 정보는 현철씨에게 집중됐다. 그는 이를 토대로 인사정보를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가 하면, 국정 전반에 대한 입김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현철씨 스스로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각종 정보가 유통되는 길목에 자리잡게 됐다. 이는, YS정권 키가 현철씨 손안에 있었다는 역설로 이어진다.

현철씨는 「1인 안기부」로 군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문어발식 국정농단은 청와대와 안기부등에 포진한 「현철 인맥」이 제공하는 광범위한 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안기부내 「정보파이프」 역할을 은밀히 수행한 김기섭(金己燮) 운영차장의 기여도는 으뜸이었다. 여기에 「현철 인맥」으로 분류되는 일부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들도 한몫 거들었다.

현철씨가 90년 3당합당후 상도동 캠프에 지각합류한 김씨를 자신의 심복으로 낙점하게 된 것은 92년 대선직후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일부 민주계 인사들이 현철씨를 정치와 「별거」 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부는 YS에게 직언을 올리기도 했다. 현철씨 입장에선 달가울 리 없었다. 이는 급기야 민주계 인사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졌고 김씨는 이 틈을 파고 들었다. 신라호텔 상무를 지낸 전력 때문에 상도동 사람들로부터 「보이」로 불리며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김씨는 현철씨 만큼은 세자 떠받들 듯 했다. 현철씨는 그런 김씨를 안기부 기조실장 자리에 앉히는 은전을 베풀었다. 하지만 「소산」(小山)과 김씨의 커넥션은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었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Y씨의 증언.

『김기섭씨가 저지른 큰 잘못 중의 하나는 왜곡된 정보를 양산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공간을 확대하려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현철씨의 입맛에 정보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거짓 정보 때문에 민주계 실세들이 특히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김덕룡(金德龍) 최형우(崔炯佑) 의원 등을 대표적인 경우로 꼽을 수 있습니다. 현철씨는 아버지로부터 「니 나쁜 짓하고 돌아다닌다면서」 「니 재벌 2세와 어울린다면서」라는 말을 듣게되면, 곧바로 김씨에게 진원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면 김씨는 현철씨의 말뜻을 미루어 짐작하고 「적절한」 정보를 만들어 보고하는 식이었습니다. 꼬투리만 잡히면 각색하고 부풀리기 일쑤였습니다』

현철씨와 김씨의 「정보커넥션」은 결과적으로 YS의 눈과 귀를 멀게 했으며, 더 나아가 YS와 민주계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YS의 자충수가 이를 부채질했다는 지적도 있다. 계속되는 Y씨의 설명.

『YS가 아들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00이 괜찮다고 하더라」거나 「XX는 안되겠어」라는 말을 하면, 현철씨는 그 즉시 김씨에게 지시해 뒷조사를 한 뒤 추후보고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특히 개각직전 검증절차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심지어 일부 인사가 개각에 앞서 김씨로부터 입각사실을 통보받았다는 것도 정치권에선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현철씨와 김씨의 밀착관계는 97년 2월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벼랑끝으로 내몰리게 된다. 특히 현철씨 조직이 급속히 와해됨에 따라 4년여동안 가동돼 온 정권지탱 기능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보사건 직후 김전대통령이 극도의 무력증을 보이자 청와대 내에서는 『현철씨가 상처를 입으면서 청와대가 무장해제됐다』는 자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YS가 현철씨에게 지나치게 의존했음을 빗댄 말이었다.<홍희곤·김성호 기자>

◎김기섭씨 근황/외부와 접촉 끊은채 “과오 뉘우치며 칩거 권영해씨 自害 충격”

김현철씨의 적극적인 천거로 문민정부 4년동안 안기부의 예산과 인사를 총괄하는 기조실장(95년 4월 운영차장으로 바뀜) 자리에 앉아 막강한 위세를 떨쳤던 김기섭(金己燮)씨. 그는 97년 2월 한보사건 이후 현철씨를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국정을 농단한 「혐의」로 국민으로부터 따가운 지탄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정도 지난 지금, 김씨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주변인사에 따르면 김씨는 외부인사와의 접촉을 일절 끊은 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칩거하고 있다. 예전에 다니던 등산을 잊은 지도 오래됐고, 유배와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자신의 과오를 조용히 뉘우치면서 권력과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있다』고 김씨의 근황을 전했다. 김씨는 특히 권영해(權寧海) 전안기부장의 자해소식을 접한 뒤 적잖게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와 권전부장은 「현철인맥」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안기부 재직 당시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김씨는 또 안기부 기구개편 과정에서 현철씨와 자신의 인맥으로 분류된 인사들이 대부분 경질된 것과 관련, 『나에게 큰 책임이 있다』며 자책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씨는 요즘 우측안면 경련증세와 뇌혈관성 두통, 활동성 폐결핵 치료를 위해 매월 2차례 경희의료원을 찾고 있다. 경희의료원 이봉암(李奉岩·55) 신경외과 수술부장은 『김씨의 증세는 많이 안정됐으며, 치료도중 별로 말이 없다』고 전했다. 김씨는 지병이 완치되는 대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지만 여행이 편치 않을 것은 틀림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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