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활동중인 한 외국인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정말 이상한 나라다. 부도가 났는데도 회사는 문을 닫지 않고 여전히 돌아간다』정말 그렇다. 지난해 하반기이후 한보 기아 진로 대농등 적지않은 대기업들이 쓰러졌지만 실제로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은 회사는 없다시피하다. 은행의 「너그러움」 덕에 협조융자로 연명하거나, 화의를 통해 여전히 오너가 경영전권을 행사하며 버티어 나간다. 회사를 살려야한다는 명분에 밀려 수많은 근로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지만 기업의 문패 자체는 온전하다. 은행문턱은 가보지도 못한채 몇백만원을 마련할 수 없어 회사문을 닫은 중소기업들 처지에서 본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물론, 문제가 있는 기업은 모두다 폐쇄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회생노력을 통해 살아날 수 있는 기업이라면 어떻해서든 살리는 것이 국가, 기업, 근로자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기업을 살리는 것이 최선이고,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는 막연한 흑백논리가 널리 자리잡고 있고, 이것이 경제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부실기업 처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부, 금융단, 법원 모두가 이런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기업이 부실화한데는 그만한 문제가 있고, 그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아무리 구제금융을 지원하더라도 깨진 독에 물붓기가 될 뿐이다. 금융자원의 배분은 제로섬 게임이다. 한 곳에 쏟아부으면 그만큼 다른 기업에는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수 없기 마련이다. 가망성이 없는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금융지원을 남발하는 것은 정말로 자금이 꼭 필요한 다른 기업들을 죽이는 일이고, 그같은 부실대출의 피해는 결과적으로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게 된다.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래서 나오는 말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수술을 할 수 없다. 한보·기아문제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몇달씩 표류된 결과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재앙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새겨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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