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단 관료체제 능가/능력 검증없는 세습 “소유·경영분리 관건”『한국의 재벌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는 럭비공 같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국내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간 외국인투자자들의 불만이다. 황제경영으로 불리는 총수의 전횡과 독단은 이같은 불확실성을 통해 기업은 물론 국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황제경영의 문제는 우리나라 재벌체제를 구성하는 핵심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 총수 일인에 집중된 무소불위의 권력, 능력과는 별개로 경영권까지 대를 잇는 세습체제, 일가족이 경영에 줄줄이 참여하는 족벌경영이 황제경영의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아 왔다. 또 이같은 독단경영이 지속되면서 기업조직은 경색화가 심화해 관료체제를 능가하는 획일성을 초래했다.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일부 대재벌의 조직문화에서 경영시스템은 동맥경화증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바로 투자와 자원배분에서 극단적 비효율성을 초래했고 오늘의 국난도 이에 무관치 않다.
우선 황제경영의 골간을 이루는 총수의 독단과 전횡은 참담한 결과들을 빚어냈다. 한보 등 부도난 대부분의 재벌들이나 구조조정의 혼미에 빠진 몇몇 대기업들의 경우도 총수의 독단으로 특정사업들을 벌였다가 위기를 맞았다. 총수체제는 사업부문이 단순했던 창업자시대에 걸맞은 시스템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수십개의 계열회사와 수백개의 사업부문을 다 파악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한때 오너가 직접 챙기는 기업일수록 의사결정이 빨라 조직에 활기가 있다는 총수체제 옹호론도 실재했다. 95년 반도체호황을 맞았을 당시 재계에서는 미국 일본기업과 달리 총수의 의지에 따라 거대투자를 결행할 수 있는 한국재벌체제의 우월성이 입증됐다며 총수체제옹호론이 득세했다. 그러나 불과 2년여만에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 주력업종에 대한 과잉투자가 관련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총수의 가족과 친인척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러나 경영권세습이 정당한 상속절차를 밟았는지, 경영능력이 검증됐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우성건설 삼익악기 대농 삼미 진로 한보 등 지난해 잇따라 좌초한 재벌들은 대부분 2세경영 기업이었다.
기조실 해체, 그룹회장직 폐지, 이사회의 정상화 등 일련의 재벌정책은 황제경영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재벌개혁의 와중에서도 주식의 편법 증여파문이 벌어지고 전문경영인체제를 출범시켰던 그룹이 총수체제로 복귀하는 등 역기능도 심상치 않다. 그러나 진정으로 재벌이 자본주의를 이끌어가고 국제경쟁력을 가지려면 소유와 경영의 분리, 즉 전문경영인체제의 도입이 관건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단순한 제도개선책만으로 이미 기업내부에 깊숙히 체질화한 황제경영을 타파하기 어렵다』면서 『소유·경영의 분리와 전문경영인체제 도입의 원칙 아래 은행대출금의 지분전환 등 재벌총수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 조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이재열 기자>이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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