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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위엄있던 재계의 代父(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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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위엄있던 재계의 代父(한국의 추억)

입력
1998.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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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직후 시계선물·커피케이크 답례로 맺어진 친분/세니와 ‘케이크비법’ 전수 줄다리기로 더 가까워져/국내외서 재벌비난 들릴때마다 생각나는 ‘거인’한국의 대사로 일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많은 재계지도자와 만날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대사관에서 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들에 대한 서로의 관점을 비교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우리는 한국의 대기업에 대해 두가지면에서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첫째는 창업자들이 아주 상이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엄격한 규율, 권위에 대한 존경, 권한의 중앙집중, 계급화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특징은 아마도 한국사회의 유교전통에 기인했을 터였다. 나는 한국에 머물던 초기 많은 재벌지도자들을 만났으며, 이같은 접촉은 더욱 빈번해졌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우리들은 재계의 두드러진 몇몇 대기업 총수들이 정부정책, 국방계획, 대미관계등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19세기 미국을 세계강국으로 발돋움시킨 미 업계의 대실업가와 같은 격이었다.

주요인물들중 한사람은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총수였던 이병철(李秉喆·87년 11월19일 작고)씨였다. 나는 그가 한국 성공담의 중심인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러면에서 그는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총수였던 정주영(鄭周永·현 명예회장)씨와 대비됐는데, 나는 이들과 함께 골프를 즐기면서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병철씨에게는 조용하고 금욕적이며, 위엄있는 기풍이 있었다. 또 일본 와세다(早稱田)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예술과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색적인 면도 있었다. 두 재계 지도자는 서로 확연히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조직을 완전 장악, 엄격한 시간관리를 통해 참모진들조차 놀랄 정도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나는 삼성그룹의 이병철씨가 여러면에서 한국재벌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상징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와 교제해보기로 했다. 말년까지 그는 각 개별 근로자들과 개인적이면서도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다른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삼성 근로자들은 삼성가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주택과 학교, 의료서비스, 스포츠팀을 포함한 여가활동등을 제공받았고, 대개는 종신고용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이병철씨는 특히 그의 관리직 인력들이 『삼성정신』을 갖추고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들을 위한 엄격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자신의 업무를 보다 도덕적으로 이끌고, 또 핵심 경영층에 헌신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기업은 이병철씨 가족 개인의 문제일뿐 아니라 삼성가족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는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재벌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우리 대사관의 한국인 참모들과 선배들은 한국의 공업화 및 현대화를 궤도에 훌륭히 올려놓는데 기여한 이같은 특징들을 이병철씨와 삼성이 가장 잘 구현했다고 말했다.

부임한지 불과 4개월 남짓한 1981년 11월30일, 동료 외교관과 정부지도자들에 대한 공식방문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당시, 나는 대사관의 몇몇 직원, 아내와 함께 이병철씨로부터 점심식사 초대를 받고는 이에 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동료들은 이 초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 신라의 맨 위층에 있는 이병철씨의 스위트 룸으로 갔다. 재무관과 공보관을 대동했다. 조용하고 품위있는 만남이었다. 나의 아내가 그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커다란 커피테이블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대사관 참사관들은 계급순으로(한국에서는 근무연수에 따라 결정됨) 우리옆에 앉았으며 삼성쪽 사람들은 우리 맞은편에 자리했다. 잠시동안 서로 얼굴을 익히는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서구적 스타일의 매력적인 테이블이 마련돼있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는 깔끔하게 준비된 최고급 성찬이었다. 아내와 나는 서로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하면 이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이병철씨를 대접할수 있을까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이병철씨는 테이블로 가서 아내 세니와 나에게 예쁘게 포장한 두개의 상자를 건네주며 풀어보도록 했다. 물론 우리는 상자를 열어봤다. 그때 대사관 동료들은 내 얼굴이 마치 핏기가 없어진듯 하얗게 변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보석으로 장식됐고 정교하게 세공된 금시계였다.

문제는 그 당시 미 행정부 참모들이 레이건 대통령 영부인앞으로 온 일본인 친구의 선물을 부주의하게 받았다고 공격받고 있는 시점이라는데 있었다. 우리는 외교관이 받을 수 있거나, 받아서는 안되는 것에 대해 미 법률이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주시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미화 65달러가 선물로서 상한선이었다. 그 이상의 물건을 받으려면 미국 관리들은 국무성의 사전승인을 받아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물은 미 정부에 귀속될 상황이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전통적 한국관습이 미 정부관리들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이같은 문화적 딜레마에 빠진 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런 순간이었다. 분명히 하건데 나는 나를 초대한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대사관 참사관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대사가 이 뜨거운 감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약간의 망설임후에 나는 품위있고 고상한 이병철씨에게 조용히 나의 곤란한 처지를 설명하고는 당신의 선의(善意)에 대해 어떻게 고마워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삼성은 시계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태원의 상점에서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사람과 외국인 모두를 위한 다양한 가격대의 시계가 있습니다. 회장님, 제 아내와 제가 부탁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이 시계를 미 정부 국고에 들어가게 하지 말고, 대신 우리가 삼성시계 공장을 견학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생산라인에서 나온 시계 하나를 선물로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다행히 이병철씨는 아주 훌륭한 통역인을 항상 대동하고 있었다. 나의 제안은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후에 나는 미국 대사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공장을 방문하고자 한다는데 이병철씨가 무척 기뻐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동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소 긴박했던 순간을 능숙하게 처리한 나의 솜씨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병철씨와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긍정적인 관계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이일화와 관련된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훌륭한 가정주부였던 나의 아내 세니는 대만 일본 한국등에서 수차례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식사초대를 받았을 때 조그만 선물을 받는 풍습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또 맛이 기막힌 커피케이크를 만드는 자신만의 비법이 있었다. 그래서 대사관저에서 이 커피케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인사표시로 이병철씨에게 전했다. 얼마되지 않아 삼성의 한 직원이 전화해서는 이병철씨가 자신이 먹어본 것중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다며 요리법을 알 수 없겠느냐고 했다고 전해왔다. 세니는 우리 가족의 비밀요리법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이병철씨가 그렇게 좋아하셨다니 기쁘다며 가끔 이 케이크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경기 용인의 호암박물관을 방문해 이병철씨와 자리를 함께 했을 때에도 그를 위한 케이크가 준비됐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이병철씨가 과학자 참모진들을 동원, 연구소에서 요리법을 알아내기 위해 케이크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업은 잘 진척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는 이병철씨로부터 공손한 시달림을 받게 됐다. 그들은 친한 친구사이가 됐다. 그러나 이병철씨는 여전히 요리법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귀하게 보관하고 있는 둘 사이의 편지를 오가게 한 계기가 됐다.

1년쯤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막 귀국한 이병철씨의 한 손자가 관저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워커대사 부인, 당신의 관저를 방문해 커피케이크의 요리법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세니는 요리법을 알려줄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젊은이는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할아버지께서 알고 싶어하십니다』라고 말했고, 세니는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당신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 요리법을 알려주지 않을 겁니다』라고 응답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이 대화가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1983년 2월2일 이병철씨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나의 요청에 따라 내 손자가 당신이 좋다면 어떤 주제라도 좋으니 용인의 삼성인력개발원을 방문해 교육생들에게 강의를 해주셨으면 하는 편지를 당신에게 보냈습니다…맛있는 케이크에 거듭 감사드리며 대사께도 안부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3월14일 용인 인력개발원에 가서 거의 4시간동안 미국사회와 관습에 대해 강의했다.

이병철씨와의 관계는 우리 부부가 소중히 간직한 기억중 하나였다. 우리 자녀와 배우자들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는 그들을 용인의 정원과 호암박물관으로 자주 데려갔다. 가끔 이병철씨는 그곳 영빈관에서 즐거운 점심을 대접하곤 했다. 그는 또 우리에게 안양 골프클럽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그때 우리가 외교임무를 수행하는데 아내가 정말 잘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이병철씨는 몇몇 중요한 합작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인 방문객들과 우리 부부를 위해 특별히 골프스케줄을 예약해줬기 때문이다. 세니는 열렬한 골프광이었다. 이병철씨는 1984년 11월24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편지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 안양골프클럽을 칭찬해주신데 대해서도 사의를 표합니다. 저는 건강을 생각해 정기적으로 골프를 치고 있습니다. 골프는 아주 훌륭한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골프는 일상생활의 한부분으로, 스포츠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저희 골프코스를 자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훌륭한 케이크에 대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대사께도 안부전해주시기 바랍니다…」

1985년 8월 이병철씨는 새롭게 한국식으로 갓 완성한 자신의 서울집 집들이에 우리 부부를 초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는 폴 클리블랜드 주한 미 대사관 공사 부부, 윌리엄 리브시 한미연합사 사령관 부부, 잭 그레고리 한미연합사 참모장 부부도 포함됐다. 이 초대가 모두 워커대사 부인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당시 이병철씨의 참모진이 알게됐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오랜 여행뒤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됐을 때 이병철씨는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를 위한 송별파티를 열어주기를 원했다. 그 초대도 내 아내를 통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 한국을 건설한 품위있고 엄청난 능력을 지닌 창업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파티는 많은 친구들과 음악, 좋은 음식으로 훌륭히 치러졌다. 이병철씨는 우리 부부를 위해 따뜻한 인사의 말을 전했다. 우리는 그의 우정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삼성의 이병철씨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미래는 정말로 밝을 것으로 확신한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때 내가 만약 약간 질투심이 있는 남자였다면 멋진 이병철씨와 내 아내사이에 오간 편지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농담 한마디를 했다. 그때 아내 세니는 마이크앞으로 나가 한국말로 약간의 감사의 뜻을 표한 뒤 봉투를 꺼내 이병철씨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병철씨가 그렇게 알고 싶어했으면서 결국 알아내지 못한 요리법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내는 이병철씨가 워커가족에게 매우 존경스러운 친구이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커피케이크의 요리법을 선물로 드린다며 말을 맺었다. 많은 웃음과 감사의 말이 뒤따랐다.

우리는 그때 이병철씨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으며, 이미 안면이 있는 셋째아들 이건희(李健熙)씨가 뒤를 이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 지도자와 한번 더 함께 할 기회를 가졌다.

1987년 우리는 캐롤 캠벨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와 부인 아이리스를 수행해 한국에 왔다. 이병철씨는 세니와 나를 보고는 기쁨을 표하면서 점심을 대접했다. 우리는 그가 위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보고 즐거움을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우리는 세니와의 편지왕래에 대한 농담을 건넸다. 주지사 부부는 이같은 친분관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후에 이것이 이병철씨가 손님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알았다. 이건희씨도 거기에 있었고, 우리의 값진 친분관계에 대해 얘기했다.

이병철씨는 1987년 11월 우리와 점심식사를 함께 한 뒤 얼마안돼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 뒤 서재에 앉아 이병철씨가 보내온 훌륭한 풍경화를 바라보곤 한다. 그 그림은 내가 은퇴한뒤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게되자 이병철씨가 보내준 것이었다. 나는 그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 감사한다. 나는 한국과 미국인이 서로의 예술, 음악, 의식, 문화적 전통등에 대해 이해를 표시하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삼성은 아직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삼성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이병철씨였다. 동·서양의 정치인들로부터 한국 재벌에 대한 무책임한 비난의 소리를 들을때마다 나는 단단하면서도 인간적인 손으로 한국을 현대사회로 이끈 거인을 생각한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황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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