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氣를 살리자(김성우 에세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氣를 살리자(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8.03.21 00:00
0 0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실업자가 100만명을 벌써 넘어섰고 3월말에는 150만명에 이른다 하고 금년말까지는 200만명을 돌파하리라는 예상이다.이미 직장을 잃은 사람들뿐 아니라 아직 간신히 자리에 붙어 있는 사람들조차도 기가 죽어 온 사회에 「기를 살리자」는 바람이 일고 있다. 한 은행에서는 임직원 부인들이 남편 기살리기 모임을 울먹이며 가졌고 어떤 중학교에서는 아버지 기살리기 편지쓰기 운동을 벌였다.

정말이지 지금 우리에게는 기(氣)가 절실히 필요하다. 용기(勇氣)와 원기(元氣)와 생기(生氣)가 솟아나야 하겠고 의기(意氣)와 활기(活氣)와 화기(和氣)가 있어야 하겠다. 기가 없으면 기력(氣力)도 기운(氣運)도 기세(氣勢)도 없다. 기개(氣慨)도 기백(氣魄)도 기상(氣像)도 안 나온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만물은 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세계관이 지배해 왔다. 기의 개념은 동양사상사 속에 면면히 관류한다. 기는 생명의 본질이다. 회남자(淮南子)는 「기란 생명이 충만한 것이다」라 했고 관자(管子)는 「기가 있으면 살고 기가 없으면 죽으니 사는 것이 그 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자학(朱子學)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이르면 사람은 기가 있기만 해서는 안되고 맑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이(理)와 기를 겸비해 있다. 마음이 정지상태에 있을 때는 성(性) 그대로가 이요 선(善)이지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기가 나타나 감정이 생기고 선악의 차가 드러난다. 기가 맑으면 선이 되고 기가 탁하면 악이 된다.

기의 사상은 동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서양에서도 유사한 것이 있다. 「기분의 본질」이란 책의 저자인 독일의 철학자 볼노는 서구의 근대가 이성을 중시해 왔으나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를 생의 감정인 기분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이 기분(Stimmung)이 기다. 볼노의 생의 철학은 인간존재의 절망속에 인간형성의 본질적 계기가 숨어 있고 인간존재의 불안의 바닥에 건전한 세계의 근거가 있다는 희망의 철학이기도 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용기라는 기를 준다.

중국의 기가 우리나라에 오면 요즘의 실상 앞에서 기가 차게 되고 기가 막히게 된다. 사람들은 기가 죽고 기를 못 편다. 기를 뚫고 기를 펴기 위해 기를 쓴다. 그 기쓰기의 일환이 기를 살리자는 운동이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 기가 죽을 때의 사회병리는 실직으로 인한 고통 못지않게 심각하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신드롬은 이미 재작년부터 명예퇴직과 감원 바람을 타고 우리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제 무더기로 떠도는 무기력한 아버지들이 군상으로 부권(父權)상실의 현상은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 사회는 가족의 집합체요 가족의 중심은 아버지다. 한 가정이 건강하자면 건전한 권위가 필요하다. 부성(父性)은 권위의 중심일뿐 아니라 가치관의 중심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부동의 권위와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자면 아버지 자신이 인격적으로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가정의 구성원들이 자기 위치를 정확하게 잡을 수 없다. 중심 있는 아버지는 가정을 통합하고 이 아버지의 힘들이 사회를 통합한다.

현대사회는 그렇잖아도 부성이 차츰 메말라 간다고 지적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부성 없이 자란 세대는 자기 속에 원리원칙이 없고 행동규범이 없다고 분석한다. 인생의 목표가 흐리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사회적 모럴이 결여된다. 책임감이나 정의감이 약하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흘러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잃어 간다. 이런 세대는 아노미(사회적 혼돈)와 아파시(무관심)를 유발한다. 부성의 결함은 이렇게 사회를 결손시킨다.

부권의 복권을 위해서라도 아버지들의 기를 살리지 않을 수 없다. 가족과 사회의 격려가 필요하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실의나 절망이 자신이나 가족의 건강뿐 아니라 나라의 건강을 해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 정기(正氣)의 회복이 급하다. 아버지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만물이 생동하는 새봄의 기운과 함께 아버지들의 기를 살리고 가정의 기를 살리고 그래서 나라의 기를 살리자. 실직보다 더 위험한 것이 실기(失氣)다.<논설고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