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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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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막후정치(문민정부 5년:3)

입력
1998.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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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실장 뒤를 캐라” 현철측 반격/‘김기섭 경질미수’ 직후 밀고자 색출작업,朴 실장 지목/“친구를 시장에 천거” 우명규 파동 겪으며 현철측 기선/“KT와 영수회담 추진” YS 大怒,덤터기쓰고 朴 실장 퇴진김기섭(金己燮) 안기부기조실장 「경질미수」(시리즈 2회 참조)의 파장은 의외로 길었다. 사건 직후 김현철(金賢哲)씨는 「밀고자」색출작업에 나섰다.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박관용(朴寬用) 대통령비서실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현철씨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현철씨는 박실장의 뒤를 하나하나 캐기 시작했고, 박실장도 현철씨가 자신의 주변을 죄어오고 있음을 어렵잖게 감지할 수 있었다. 몇몇 사람이 나서 화해도 주선했지만 두사람의 관계는 회복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현철씨가 결정적인 「이니셔티브」를 쥐는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우명규(禹命奎) 서울시장 인사파동」이었다. 94년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참사의 책임을 지고 이원종(李元鐘) 시장이 사표를 냈다. 후임에는 우명규 당시 경북지사가 임명됐다. 그러나 우씨는 시장 임명 열하루만인 11월1일 사표를 내게 된다. 성수대교 관리를 맡은 동부건설사업소의 위험보고가 있었을 때 부시장으로 있었던 그의 「전력」이 문제가 돼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끝에 불명예 퇴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했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청와대내의 치열한 권력암투가 있었다.

현철씨는 우씨가 시장이 되자마자 『우씨의 시장임명은 박실장의 농간이었다』는 내용의 보고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올리게 된다. 우씨는 박실장과 같은 동아대 출신에다 친구 사이였고, 박실장은 이런 우씨를 서울시장직에 앉히려는 욕심에 인사품의서를 올리면서 학력난에 「동아대졸」을 삭제하고 「중앙대 박사」만 기재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씨는 성수대교 참사의 책임을 나누어져야 할 당사자 중 한명이었음에도 박실장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이를 묵살했다는 첨언도 있었다. YS가 노발대발했음은 불문가지였다. 그렇잖아도 『박실장이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현철씨와 그 주변으로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참이었다. 박실장 자신도 YS의 시선이 싸늘해졌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명규 파동」과 관련한 박관용의원 자신의 이야기.

『말도 안되는 보고였습니다. 우명규씨는 전임 이원종시장이 천거한데다, 민정수석과 행정수석도 영순위로 추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정권전체가 사고 노이로제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씨는 기술직 출신인데다 서울시정에 밝아 최적임자로 꼽혔습니다.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그래 좋지. 연락했나」라고 합디다. 그래서 「각하가 직접 하십시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학력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비서실에선 학력난에 손을 댈 수 없게 돼 있습니다. 민정수석실과 행정수석실에서 만들어온 품의서를 그대로 가져갔을 뿐입니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우명규씨 파동 이후 대통령이 눈에 띄게 쌀쌀하게 대했던 건 사실입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박관용이가 친구를 시장시키려고 그랬다」고 이야기했다는 사실까지 전해듣게 됐습니다』

우명규 파동은 일과성이 아니었다. 같은 해 11월10일 YS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참석차 출국하게 된다. 대통령 출국에 의전이 없을 수 없었는데, YS는 내연(內燃)상태이던 박실장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의전석상에서 보란 듯이 표출했다. 그 배경에 현철씨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X씨의 목격담.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는 비서실장을 불러 「부재중에 잘 챙기라」는 지시와 격려를 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또 수석비서관들과 악수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날 박실장을 따로 부르기는 커녕 박실장이 배웅나와 있는데도 자동차 창문도 한번 안 내리고 그냥 떠나 버렸습니다. 청와대내에 「박실장 물먹었다」는 소문이 안 돌 수 없었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YS가 APEC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청와대를 비운 사이 여야 영수회담 건이 불거져 나왔다. 당시는 각종 대형사고와 인사파동에다 검찰의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기소유예 결정까지 겹치는 바람에 야당의 공세가 치열하던 시점이었다. 이기택(李基澤) 민주당 총재가 이런 분위기를 업고 10월29일 YS에게 영수회담을 제의했으나 이미 퇴짜를 맞은 상태였다. 야당으로선 약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는데, YS조차 국내에 없다보니 정국상황이 극도로 경색될 수 밖에 없었다.

영수회담의 필요성은 황낙주(黃珞周·현 한나라당 의원) 국회의장과 서청원(徐淸源·현 한나라당의원) 정무1장관쪽에서 먼저 제기됐다. 언론의 입장에선 YS가 거부한 영수회담 이야기가 여권핵심부에서 재거론된다는 게 관심의 초점이었다. 자연 도하 신문이 주요기사로 취급했다. 박실장은 부랴부랴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되는 「비서실장 전문」을 통해 YS에게 국내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회담이 필요할 것 같다』는 자신의 의견을 첨부했다. 그것이 상처를 덧내고 말았다. 박의원의 이어지는 이야기.

『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버럭 화부터 냈습니다. 「지금 영수회담이 왜 필요하나」라며 저를 질책했습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일을 추진한 것처럼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전후 사정상 내가 당해야 할 사안이 아닌데도 그러길래 「누가 또 중간에서 장난을 하는구나. 이제 실장직을 그만둘 때가 됐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 Q씨의 이야기는 이 과정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

『박실장 혼자 당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청와대와 민자당의 상당수 핵심인사들이 영수회담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현철씨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영수회담보다는 국정쇄신으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정국인식의 차이였죠. 게다가 김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이기택총재를 영수회담 상대로 쳐주지 않았습니다. 애시당초 이총재는 자신과 같은 반열이될 수 없다는 게 YS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철씨의 판단에 마음이 끌릴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게다가 박실장에 대한 대통령의 불신이 극에 달해있던 때여서 박실장이 결과적으로 덤터기를 쓰게 된 셈이었죠』

그해 11월말에서 12월 사이엔 「사고공화국」에 또하나의 오점을 추가한 서울 아현동 가스기지 폭발참사가 있었고, 공룡부처 재경원을 탄생시킨 대대적 정부조직 개편이 있었다. 정부조직 개편은 조각에 가까운 개각을 불러왔다. 18개 부처의 장관(급)이 물갈이 됐고, 청와대비서실의 라인업도 새롭게 구성됐다. 박관용 실장이 물러나고 한승수(韓昇洙) 주미대사가 비서실장에 기용됐다. 박실장과 함께 최형우(崔炯佑) 내무장관, 김우석(金佑錫) 건설장관, 서청원정무1장관 등 민주계도 나란히 내각에서 물러났다. 민주계의 대거 퇴진은 면모일신의 의지표현이기도 했지만, 청와대내의 권력쟁투가 일단락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퇴임하는 박실장에게 아예 아무자리도 주지않으려 했다고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박실장이 맡게된 정치특보라는 자리도 주위에서 극력 진언해 겨우 하나 떼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비정치인 출신의 한승수씨(현 한나라당 의원)가 비서실장이 되면서 청와대는 정치적 평온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소산(小山)의 독주(獨走)가 강제(强制)한 표면적 평온함일 뿐이었다.<홍희곤·김성호 기자>

◎YS의 비서실장들/小山 못넘고 알력… 소극… 무력 4명 모두 “한계”

YS정권 5년간 청와대를 거쳐간 비서실장은 모두 4명이었다. 박관용(93년 2월∼94년 12월)­한승수(94년 12월∼95년 12월)­김광일(金光一·95년 12월∼97년 2월)­김용태(金瑢泰·97년 2월∼98년 2월)씨가 그들이다. 박관용씨는 상도동 본류가 아니라는 「취약성」 때문에 제약이 적지 않았다. 스스로도 소신껏 일할 엄두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악역을 담당하려 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다. 재직 후반기 현철씨와 알력관계에 있긴 했으나, 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점도 한계로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한승수씨는 원천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이 비서실장이 돼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정치를 모르고선 비서실장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씨 스스로도 정치에는 적극적으로 간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현철씨와는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

김광일씨는 3당합당 합류거부라는 「불충」에도 불구하고 YS가 능력을 사 발탁한 인물이었다. 재직 내내 현철씨와 충돌한 것으로 일반에 알려져있으나, 실은 현철씨가 적극 천거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도 대체로 원만했다. 김씨는 그럼에도 제대로 비서실장직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원종(李源宗) 당시 정무수석과의 갈등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까닭이었다.

문민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인 김용태씨는 직함실장이자 의전실장에 그쳤다. 김광일씨가 중도하차한 뒤 자리 메우기식으로 들어왔다는 평가이다.언론계·관계·정계를 두루 거쳐 외형상으론 비서실장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었으나 문닫는 정권의 무력을 보여준 비서실장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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