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섭 경질”에 자리 박차고 나가/YS,94년 5월 가족회식중 아들 안기부관여 질책/거칠게 반발한 현철씨 승리… ‘소통령’ 위치 굳혀/가족예배통한 독대가 마력,거의 모든 인사에 개입『쾅』 94년 5월 하순 청와대 상춘재. 김현철씨는 거칠게 문을 닫으며 만찬장을 나섰다. 표정은 상기돼 있었고 손에는 미처 걸치지 못한 상의를 든 채였다. 만찬장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부부, 현철씨의 장인인 김웅세(롯데월드 사장)씨 부부, 그리고 현철씨의 부인 정현씨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현철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김기섭(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씨 경질문제였다. 김대통령은 만찬 도중 현철씨의 안기부 관여를 질책하며 『5월말 차관인사 때 김실장을 경질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붓한 가족식사 자리에서 거론하기엔 다소 느닷없는 이야기이긴 했으나 YS로선 그만큼 절박성을 느끼고 있던 문제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현철씨의 반응은 거친 반발이었다. 「나와 김실장이 뭘 잘못했다고 그러느냐. 김실장은 아버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다. 왜 그런 사람을 자르려 하느냐. 나와 김실장을 모략하는 측에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교묘하게 내 주변을 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당할 순 없다」
숨돌릴 새 없이 쏟아낸 현철씨의 「반론」은 이런 요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할말을 마친 현철씨는 의자에 걸어 놓은 저고리를 휙 잡아챈 뒤 성난 걸음걸이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머쓱한 표정으로 어이없어 하는 김대통령에게 사돈 김웅세씨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는 『아직 젊은 나이여서 저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그럽게 봐 넘기십시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모처럼의 청와대 가족회식은 이렇게 파투가 나 버렸다.
청와대 가족회식 사건은 아버지와 아들간의 불화라는 시각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김기섭씨를 안기부 기조실장 자리에 앉힌 사람은 다름아닌 현철씨였다. 이 자리는 안기부의 인사권과 예산권을 거머쥐는 핵심요직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당초 이 자리에 K씨를 보내려 결심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YS가 직접 본인을 불러 통보까지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반면 현철씨로서는 강골형의 K씨 대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김기섭씨를 「안기부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뜻이 자신의 의중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현철씨는 즉각 김대통령에게 『K씨가 자신의 내정사실을 외부에 떠들고 다닌다』는 의도적 보고를 올렸다. 인사보안을 중시하던 김대통령이 K씨 인사를 백지화했음은 물론이다.
김기섭씨 경질문제를 둘러싼 YS와 현철씨의 충돌은 이런 상황에서 빚어진 구조적 마찰이었다. 결과는 현철씨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 승리는 김영삼정권 5년의 운명과 불가분의 함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대통령은 현철씨가 김기섭씨를 통해 안기부 일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YS는 아들에 대한 애정과 그의 「보좌」가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끝내 떨쳐 버리지 못했다.
92년 대선과정에서 YS의 제1참모로 부상한 현철씨는 김영삼정권 출범 이후 「2인자」의 위치를 굳혀가고 있었다. 만찬석상을 이렇게 박차고 나갈 수 있었던 장면이 현철씨의 막후지위를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대선에서 취임까지의 「파워 공백기」에 현철씨는 이미 YS가 가장 신뢰하는 정보채널로 기능하고 있었다. YS의 청와대 입성(93년 2월25일) 이후 현철씨는 일요가족예배란 형식을 통해 YS와 정례적으로 독대했다. 1인 권력체제에서 독대의 횟수는 최고권력의 신임도와 정비례의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김영삼정권 초기 2년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무성(한나라당) 의원의 이야기.
『초기엔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컸습니다. 대통령에게 하기 어려운 말은 현철씨가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일단 최고 권좌에 오르면 아무리 가신이라해도 직언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것이 권력의 생리입니다. 따지고 보면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겁니다. 권력의 생리에만 민감했지 권력의 굴절이 가져올 파국을 내다보지 못한 것입니다』
독대의 마력이었다. 모든 길은 현철씨로 통했다. 이리저리 꼬였던 문제들도 현철씨에게로만 가면 쉽게 해결됐다. 권력은 자석과 같아서 누가 더 강한 자력을 갖고 있느냐가 상황을 결정한다. 국정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복잡한 집행경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국정은 복잡다기한 회로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제어하는 수단은 「인사」라는 대단히 단순한 칩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철씨는 김영삼정권 출범과 동시에 이미 누구도 넘보기 힘든 위치를 구축하고 있었던 셈이다. 청와대비서관 출신 Q씨의 증언.
『문민정부 초대 인사부터 현철씨가 개입했습니다. YS 자신 당선자 시절에 수많은 사람을 천거받았는데, 이들에 대한 검증작업을 현철씨가 주로 담당했습니다. 스크린의 주체도 주체지만 방식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김영삼정권 실패는 인사실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외의 인물과 검증안된 인물을 내미는 깜짝인사가 국정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YS는 인사에 관해선 현철씨를 제외하곤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말하면 샌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밀실인사의 파행을 거듭했던 것이죠』
거의 모든 인사자료는 일단 현철씨의 필터링을 받아야 했다. 현철씨를 거친 뒤 YS에게 올라가거나 YS가 검토한 뒤 현철씨에게 전달되는 식이었다. 현철씨가 이충범 변호사, 김혁규 경남지사, 김무성·김길환(한나라당) 의원 등 문민정부 역대 청와대 사정비서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도 이들이 존안자료 등을 다루는 인사담당 비서관들이었기 때문이다.
현철씨의 인사개입과 관련한 박관용(YS정권 초대 청와대비서실장) 한나라당 의원의 증언.
『94년 10월께로 기억됩니다. 정부부처 고위직 자리가 하나 비어서 모 수석 비서관에게 인사안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인사안이라는 게 원래 2배수 아니면 3배수로 올라오는 게 관례입니다. 그런데 달랑 한 사람 명단만 들고 왔습니다.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더니 「협의가 끝났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누구와 협의했다는 말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방금 김소장(현철씨를 지칭)을 만나 협의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협의 끝났으면 나에게 뭐하러 가져오느냐. 알아서 해라」고 앉은 자리에서 보고서를 내던져 버렸습니다』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현철씨의 인사개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언제나 정보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무엇보다 YS의 절대신임이란 마스터키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해도 대통령 아들의 국정개입은 필연적으로 화를 부르게 돼 있었다. 한국적 정치풍토가 낳은 또 다른 「불가피한」 교훈을 YS부자는 자신들의 교훈으로 새기지 못했던 것이다.
YS가 현철씨를 깊이 신뢰하면서 많은 것을 의존했던 이유는 「공조직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상당수 상도동 사람들은 지적한다. 정국운영은 마땅히 공조직내에서 이루어져야 함에도 아들이라는 「1인 사조직」에 온통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보니 정권구조가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은 자리를 챙길 욕심으로, 정치인들은 공천과 당직을 따낼 심산으로, 기업인들은 끈을 걸칠 요량으로 현철씨에게 몰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통령」 「부통령」으로 불리는 막후 최고실세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홍희곤·김성호 기자>홍희곤·김성호>
◎소산 개인사무실/‘중학동’ 매일 출근 은밀한 만남은 호텔롯데 32층서
김현철씨는 93년 초부터 4년여동안 권력의 징표이자 막후실세를 상징하는 개인사무실을 여러 군데 갖고 있었다. 주변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산」을 둘러싼 의혹의 상당수는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사무실에서 생산됐다. 현철씨는 93년 3월께 박태중씨 소유의 서울 역삼동 한양빌딩 3층 (주)심우 한켠에 5평 남짓한 공간을 만들어 사무실로 이용했다. 이 곳만 해도 대선을 도와준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는 「연락소」에 지나지 않았다. 김씨는 이즈음 반포의 56평형 아파트를 전세준 뒤 구기동의 빌라로 이사하고, 고려대 행정대학원(6월)에 합격한 뒤 중학동의 미진빌딩 4층으로 사무실을 옮겨 97년 2월까지 유지했다.
그는 이 곳에서 측근인사들과 수시로 만나 여러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으며 96년 4·11총선 직전에는 공천작업을 은밀하게 추진했다. 수행비서 출신의 한 인사는 『김소장(현철씨의 별칭)은 거의 매일 아침 중학동 빌딩으로 출근, 논문준비에 매달리다 오후에는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면서 『일주일에 한 번정도 청와대에 들어갈 때마다 무언가 들고가는 것같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때 중학동 사무실을 그대로 둔 채 세종문화회관 뒤쪽 세종빌딩에 별도의 사무실을 차렸는데 언론에 곧 노출돼 폐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소산의 국정농단은 보다 은밀한 곳에서 이뤄졌다. 서울 소공동의 호텔롯데 32층 스위트룸이 바로 그 곳. 중학동 사무실은 편하게 만날 수있는 접촉장소인데 반해, 요인들과의 만남은 대부분 이 곳에서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김씨는 방 3개가 딸린 이 사무실을 개인집무실, 접견실, 대기실 등으로 나눠 오가는 사람들끼리 조우를 피하도록 하는 등 치밀하게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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