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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산업 허상뿐인가

입력
1998.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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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금융지원·창업지원시스템 미비로 좋은 아이디어 갖고도 높은 창업의 벽에 좌절/대기업도 ‘파트너’ 인정보다는 기술에만 눈독우수 두뇌집단이 머리를 맞대 신기술을 개발하는 고부가 최첨단 산업, 벤처. 이 벤처기업이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벤처기업의 육성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또 각종 연구기관 등에서도 벤처만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실상은?

우리 벤처기업들은 정부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금융지원이나 창업지원시스템의 미비로 아직 걸음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우선 기술력과 아이디어가 있어도 높은 창업의 벽 때문에 주저앉기 일쑤다. 당장 기술이나 연구성과를 믿고 투자하는 풍토가 없기 때문에 창업자금을 구하기부터 「하늘의 별따기」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G사 C사장. 『우리 투자자들은 기술력보다는 단기 수익성을 보고 투자를 결정한다. 심지어는 창업투자회사에서도 매출실적이 없으면 지원하지 않는다. 연구, 개발, 상품화, 초기판로개척까지 모두 창업자 혼자 할 수밖에 없다. 성공적으로 신기술을 개발한 뒤 상품화 단계에서 자금을 구하지 못해 주저앉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대부분 전문가들은 이처럼 기술력보다는 자금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담보할 만한 기술력이 있다하더라도 벤처기업이 기술을 공개하고 객관적으로 평가받은 뒤 이를 바탕으로 자금을 유치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는 기술이나 산업재산권 등 무형의 담보로 대출이나 현물출자를 허용하는 제도가 활성화해 있다.

정부기관의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체계도 엉망이다. 기술평가가 치밀하지 않기 때문에 자금이 정말 필요한 곳으로 나가지 않는다. 최근 물의를 빚은 중복 지원금 문제도 벤처업계에서는 흔한 일.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중소기업청 등 벤처기업 지원창구가 여러 개로 나눠져 있는 점을 이용, 한 가지 기술에 대한 보고서를 적당히 다른 방식으로 꾸며 중복신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위해 창업할 때 ○사 ○연구소 ○기술 등 비슷한 법인을 서너개 만드는 것도 벤처 창업의 「매뉴얼」처럼 됐다. 지원금을 신청할 때 관계와 연줄을 대 주는 「브로커」까지 생긴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니 민간 투자가들이 국가의 기술 담보를 근거로 한 대규모 투자를 꺼린다.

기껏 타낸 지원금을 연구·개발(R&D)에 적절히 이용하면 그나마 양심적이다. 소프트웨어 개발로 벤처지원금을 3억원 탄 A씨. 『지원금을 타내는 데에는 전 직장에서 알게된 정부 고위관계자들과의 안면이 크게 도움이 됐다. 3억원중 일부는 연구비에 투자 했으나 나머지는 고리 금융상품에 가입해 이자놀이를 하고있다』 정말 돈이 필요한 벤처기업들은 자금난에 시달리고 아까운 지원금은 엉뚱한 곳으로 새나가고 있는 것이다.

벤처기업의 핵심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우수한 인력 수급이 쉽지 않은 것도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대학교수 연구원 등 기술보유인력이 벤처기업에서 능력을 발휘할만한 제도적 장치가 없는데다 우수인력에게 만족할 수준의 급여를 보장할 만한 여력도 없다. 창업자들이 알음알음으로 학교 선후배를 끌어오는 데 급급한 실정이다. 따라서 창업당시에는 신기술로 승부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벤처기업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자동제어시스템 개발업체인 W기술 K사장. 『뛰어난 벤처기업이 있으려면 우수한 인력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수적이다. 처음에는 화려한 인력구성으로 출발해도 계속 A급 인력을 수혈할 길이 없다. 누가 위험도가 높고 보수는 상대적으로 낮은 벤처기업으로 오려 하겠는가』

게다가 벤처기업들을 지원하면서 공생해야 할 대기업들이 벤처상품을 외면하거나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이들 기업을 농락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은 벤처기업의 기술이 열등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기술력이 뛰어날 경우 싼 값에 기술만 빼가려한다. 대기업들이 벤처기업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얘기다.

레이저가공기를 생산하는 H기술 K사장. 『제품을 외국보다 더 싸게 공급한다고 해도 대기업들을 설득시키기 힘들다. 외국제품이 좋다는 편견 때문이다. 국내 벤처 제품을 썼다가 뒤에 문제가 발생하면 담당자가 문책을 받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외국업체들이 훨씬 개방적이고 우호적이다』

전자부품을 개발하는 벤처기업 M사 S사장은 최근 한 재벌기업 전자회사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준비 중이다. 3년여동안의 연구 끝에 독자기술로 개발한 제품을 도용당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기술 개발을 끝내고 특허까지 낸 뒤 상용화 단계에 들어간 제품을 놓고 대기업과 기술협상을 벌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로열티 수준에서 의견이 맞지않아 협상은 무산됐으나 이 과정에서 노출된 제품을 한달만에 대기업이 고스란히 본따 자체 상표로 박람회에 내놓은 것. S사장은 『국내 전자업계를 이끌어가는 대기업이 소규모 벤처기업이 각고 끝에 내놓은 기술을 베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분개했다.

벤처기업도 일정한 성장을 한 뒤에는 대기업의 좋지않은 행태를 은연중에 모방한다. 벤처기업이 궤도에 오른 뒤 지속적으로 R&D에 힘쏟기보다는 무리한 사업 확장에 나서는 것이다.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효시로 꼽히던 큐닉스컴퓨터. 81년에 창업한 지 1년만에 흑자를 내고 성장가도를 달리던 이 회사는 지난달 끝내 부도를 냈다. 레이저 프린터로 창업한 지 10여년 만에 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으나 PC, 이동통신, 케이블TV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큐닉스컴퓨터가 지급보증을 선 파이낸싱 회사를 설립하고 경기 성남에 새 사옥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큐닉스는 파이낸싱사의 부실 여신을 막는 데 급급하다 IMF사태 이후 금융권의 대출 회수를 견디지 못해 종국을 맞았다. 재벌기업의 확장 일변도 경영, 문어발식 사업 다각화와 꼭 닮은 꼴이다. 사업이 상승세를 타자마자 고질적인 「대기업병」에 걸리는 실책을 범한 것이다.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 김인수 소장은 『경쟁력의 두 축인 기술과 자금 양 측면에서 아직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우리 벤처기업의 현주소』라며 『탄탄한 과학기술의 토대와 함께 벤처기업이 효과적으로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김경화 기자> 기

◎벤처기업이란…

벤처(Venture)는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기초로 창업한 소규모의 창조적인 기업을 말한다. 고속성장 가능성이 있는 반면 실패할 위험도 크다는 점에서 모험(벤처)기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실제 성공가능성은 10% 이하다.

벤처기업은 기업가 정신과 기술의 독창성, 아이디어의 참신성이 중요한 요소. 개인 또는 소수의 핵심적 창업인이 신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초로 개인투자가(에인절 캐피털)나 벤처캐피털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창업한다. 실패위험이 높은 만큼 한번 성공하면 성장 및 수익성도 엄청나다.

벤처기업에 대한 시각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고 일반기업과 구분도 쉽지 않다. 미국은 벤처의 특징을 기업가 정신과 아이디어의 참신성, 사업성에서 찾는 반면 우리나라는 기술의 첨단성을 중시한다.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르면 다음 요건을 만족하는 기업을 벤처기업으로 인정하고 있다. ▲연구개발 투자비 비중이 총매출액의 5% 이상 ▲특허권과 실용신안권 등을 이용, 생산한 제품의 매출이 총매출액의 50% 이상 ▲창업투자회사, 신기술사업금융사 등 벤처캐피털의 투자총액이 기업 자본금의 20%이상인 기업 또는 벤처캐피털이 인수한 주식총액이 자본금의 10%이상인 기업 등이다.<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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