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여기 서있는 걸까”/남녀간의 사랑통해 개인의 고유영역과 정체성에 대한 모색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예상자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체코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69)의 최신작 「정체성」(민음사 발행)이 번역출간됐다. 지난해말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던 작품. 「느림」이후 3년만에 나온 쿤데라의 아홉번째 소설이다.
쿤데라가 「정체성」에서 다루는 것은 가혹한 시간의 흐름에 내던져진 개인의 정체성문제다. 주인공인 중년의 이혼녀 샹탈의 말처럼 『그렇다면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하는,고전적 물음이다. 나이 70이 다 된 쿤데라는 이에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해답을 가지고 다소 염세적으로 접근한다. 개인의 삶은 단일한 기준으로 평가되고, 공공장소에서는 카메라의 감시를 받고, 심지어 앙케트조사원으로부터 『섹스는 어디서 얼마나 자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까지 받아야 하는 세상에서 개인은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과 정체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젊은 시절 모든 남자의 장미이고 싶었던 샹탈은 어느새 육체의 소멸을 깨닫는 중년이 돼 남자들이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깨닫는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익명의 남자가 편지를 보내온다. 샹탈은 자신의 장미향이 되살아난다고 느끼지만, 발신자는 그의 애인 장마르크였다. 샹탈은 장마르크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고 혼자 런던으로 떠나 버린다. 뒤쫓아간 장마르크는 샹탈의 뒷모습을 보고 이름을 부르지만 뒤돌아본 그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세월이 만들어놓은 「참을 수 없는」 끔찍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이 변화한 현실에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쿤데라는 이 줄거리를 52편으로 나눈 짤막짤막한 이야기에 담아놓았다.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묵직하지는 않지만,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 속에 트로츠키주의와 68년 학생혁명 등의 단어를 얽어놓은 그의 이야기솜씨는 늘 음악처럼 감미롭고 조화롭다. 『무관심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이라든지 『생리대 기저귀 세제 먹거리 이것이 인간의 신성한 순환계통』이니 하는 작품 중간중간에 번득이는 그의 언술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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