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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한 관리 노신영(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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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한 관리 노신영(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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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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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흐름 꿰뚫은 ‘영원한 외교관’/한국인 첫 유엔총회연설 강한 설득력 ‘호평’/‘조국에 봉사’ 열정·뛰어난 조직력 두루 갖춰/환갑날 전통한국식 잔치 베풀어줘 큰 감동85년 10월21일 노신영 당시 국무총리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유엔 창설 40주년을 기념해 유엔이 총회 연사로 초청한 60명의 세계 각국 정부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짧지만 설득력있게 한반도 평화를 강조하고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호소했다. 그의 연설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노신영 총리가 10월18일 뉴욕을 향해 출발할 때 나와 아내 세니는 김포공항에서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11월2일 그가 2주간의 유엔 및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할 때도 우리는 공항까지 마중나가 성공적인 여행에 대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는 미국에서 조지 부시 당시 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미국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그의 뛰어난 이해력과 누구에게도 호감을 주는 매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일부 한국 언론은 내가 그의 출·입국때마다 공항에 나간 것으로 상징되는 우리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추측성 흥미기사를 싣기도 했다.

사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우정이 있었다. 우리는 민감한 문제들을 다룬 수많은 회의에 함께 참석했다. 북한이 83년 10월 9일 미얀마 랑군 아웅산 폭탄 테러 만행을 저지른 때가 전형적인 예이다. 당시 노총리는 국가안전기획부(NSP) 부장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추후 조사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문제 처리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사건발생 사흘뒤인 10월12일 오후 5시30분 은밀히 만났다. 이같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한미 양국간의 협력은 더욱 증진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협력도 개인간의 신뢰와 상호 이해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게 사실이었다.

주한 미 대사관의 최고 책임자로서 나는 당연히 한국 외무부를 상대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노총리는 내가 대사로 부임하던 81년 여름에는 외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이내 조화로운 업무관계를 맺었다. 한국의 외무부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내가 접한 그 어떤 나라의 외교관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고 재능 또한 출중했다. 외무부는 조국에 봉사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목표는 한국 정부가 가장 똑똑하고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엄격한 선발 절차를 통과한 한국의 외교관들은 외국을 두루 여행할 기회를 누렸으며 국내외에서 주요 결정 입안자들과 수시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무역이든 문화든 중요한 정책상의 문제 때문에 외무부와 접촉할 필요가 생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사 임기동안 매우 훌륭한 한국 외교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내게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이해를 돕기위해 몇 사람의 예를 들고자 한다. 나는 외무부 미주국에서 근무하던 두명의 관리들을 상대했는데 그들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노명씨는 내가 부임할 당시 외무부 정무차관보를 지냈다. 그는 90년 10월 러시아 주재 대사를 역임했고 92년 외무장관이 됐다. 미주국을 거친 박건우씨도 후에 외무부 차관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는 워싱턴에서 지금까지 3년동안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박대사와 그의 아내는 우리 부부와 각별한 사이였다. 또 다른 외무차관인 노재원씨도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으며 92년 9월 대한민국 초대 중국 대사로 임명됐다. 그는 외무부에서 은퇴한 뒤 거의 해마다 내가 근무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대를 방문하고 있다.

김동휘씨도 외무부의 또다른 스타였다. 경제 전문가인 그는 상공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아웅산 폭탄테러 당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는 이미 아웅산 테러의 또 다른 희생자인 이범석씨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바 있다. 이밖에도 유능한 외교관들을 꼽자면 한이 없을 정도였다.

조국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대변한 이들 외교관에게는 한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도 한결같이 남편들을 도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한국 외교관 부부들은 우리 부부와도 친구가 됐다. 우리는 자주 시간을 내 한미 양국의 사회상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신영 총리는 분명 내가 체험한 한국 생활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해온 사람이다. 우리 양가의 가족들도 이런 저런 관심과 경험을 공유하는 등 유달리 마음이 잘 맞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다재다능하고 수완이 뛰어난 이 정치인의 역정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그는 지금은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나는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하기전에는 한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는 인도 대사를 거쳐 76년부터 80년까지 주 제네바 대사로 근무했다. 내가 81년 8월4일 처음으로 그를 방문할 당시 그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외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 죽이 잘 맞았다. 그의 부인 김정숙 여사와 세니도 금세 친해졌다. 그래서 우리 네 사람은 자연스레 함께 즐기는 기회를 갖게 됐다.

한번은 네 사람이 주말을 이용해 제주도로 놀러갔다. 그 때의 추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가족과 자녀양육 문제, 그리고 자녀들의 성장과정과 그들이 이룩한 성취 등에 관해 뜻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평양에서 나고 자란 노신영 총리는 평양 최고의 명문 중학교를 다녔다. 공산치하를 피해 남하한 그는 서울에서 가난한 실향민 신세를 면치 못했고, 길거리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는 등 고학을 하며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병역을 마치고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뒤 56년 외무부에 들어갔다. 영민함과 열정, 어학 재능, 뛰어난 조직력 등을 두루 갖춘 그는 동료들에게 는 칭찬과 함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평양에서의 경험 덕분에 김일성 공산 정권의 어두운 면을 깊이 이해했고, 그만큼 자유의 소중함도 뼈저리게 인식했다. 또 공산체제가 아닌 민주체제 아래 한반도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게 됐다.

충직스런 정부 관리였던 그는 때로 그가 모시던 권위주의적 대통령들로부터 저돌적이고 무모한 정책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충실히 지시를 수행하는 한편 충격과 파급 효과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썼다. 우리는 조용하면서도 꾸준하게 서로간의 신뢰를 쌓았으며 그 결과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특히 우리는 그가 추구했던 역할에 대해서도 허물없이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노신영 장관은 82년 6월 안기부장에 임명되면서 외무부를 떠났다. 외교관인 그는 그러나 안기부장으로 발탁된 것에 대해 그리 기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안기부장을 맡은 이후 우리 두사람이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할 기회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됐든 조용한 오찬 자리를 만들었고, 양국과 관련된 핵심 안보 현안을 논의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노부장이 국내외에서 안기부의 강성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격려와 노력에 힘입어 우리는 매달 정기적으로 시내 호텔에서 오찬 회동을 갖기로 했다. 이 자리에는 그의 참모 한 두명과 외무부 인사 두명, 우리 대사관 직원 두 세명이 참석해 안보와 외교 현안들을 토의했다. 이런 모임은 한미 간의 신뢰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안기부를 이끈 뒤 노신영씨는 85년 2월 국무총리가 됐다. 이에 따라 우리 두사람의 한결 부드러운 접촉도 재개될 수 있었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그와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유익한 대화와 웃음, 그리고 뭔가 배우게 된다는 보상이 뒤따랐다. 그가 미국의 입장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를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은데다,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로 69년부터 72년까지 3년동안 중대한 시기를 보냈다. 시사 문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그는 국제 문제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통달해 있어 종종 나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그와 대화하는 건 마치 전세계적 네트워크를 통해 뉴스 브리핑을 받는 것같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딕시(워커 전 대사 애칭), 그게 내 직업인걸요』라고 말했다.

노씨는 3남2녀를 두었는데 나는 이중 세명의 자녀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의 경력은 나의 그것과 관계가 깊었다. 내 딸 앤의 남편은 노씨의 장남 경수씨가 자신이 만나본 동년배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람중 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우리가 워싱턴과 서울에서 열린 학술 회의에 함께 참석할 기회도 있었다. 일례로 우리 두사람은 97년 11월 워싱턴에 있는 조지타운대학에서 개최한 북한의 선거제도에 관한 학술회의에 나란히 참석했다. 막내딸인 혜경양도 장남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한 스위스 신사는 내게 『그녀는 프랑스 사람보다 더 프랑스어를 잘한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 철수씨는 내가 서울에서 대사로 재직하던 후반기 삼성 그룹에서 근무했다.

그는 외무장관 때든 국무총리를 지낼 때든 내가 만나보라고 요청했던 미국인방문객들에게는 항상 시간을 내주었다. 그는 미국 상하원 의원들과 주지사들, 그리고 재계 지도자들을 위해 오찬과 만찬을 베풀기도 했다. 그의 정중한 태도는 친밀한 개인 관계가 국가간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얼마만큼 도움을 주는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물론 양국의 정책이 상반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고 또 격렬한 논란을 몰고올 수 있는 상황도 발생했다. 하지만 서로간에 싹튼 존경심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이런 문제들을 다루면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했다. 이런 문제들은 한미 양국 동맹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사실 그리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이 점을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환갑날인 82년 4월14일 노신영씨 부부는 코리아 하우스에서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들은 세니와 내게 멋진 한복을 선물했고, 우리는 그 한복을 입고 잔치에 나섰다. 우리 아들 딸들도 모두 이날 잔치에 참석했으며 형식을 갖춘 의식도 진행됐다. 이날 축하연은 워커 가문에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가족들도 이날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일부 미국인 동료들은 한복을 입고 파티에 참석하는게 당연히 여겨진다면 이는 미국의 품위와 입지를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한국인들도 일상 생활에서 우리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특히 이런 행동은 한국 문화에 대한 경의를 표시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 아내는 치마 저고리를 입을 때면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 우리가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는 가끔 한국 의상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내 큰 손녀는 아마도 어린 시절 노신영씨 부부가 총리 공관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준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같다. 이 아이는 지금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닌다. 손녀딸 생일은 12월30일이다. 그런데 85년에는 그 손녀와 가족들이 크리스마스를 우리 부부와 함께 보내기 위해 서울에 머물렀다. 노신영씨 부부는 손녀딸의 생일이 크리스마스 휴일에 묻혀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날 일은 우리가 발전시켜온 가족 같은 관계의 중요성을 더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들이 얼마나 양국의 상호 이해에 도움이 되는지를 예증해주었다. 내 부임초기에 열렸던 환갑잔치와 주한 미대사로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 휴가때 마련된 손녀딸의 생일 파티는 한국의 인정과 환대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우리 양가의 우정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서울에 갈 때면 어김없이 노총리와 그 가족을 만난다. 나는 97년 12월에도 그와 함께 있었다. 올해에도 서울을 방문해 그와 의견을 나누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워커 전 주한 미대사 번역="이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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