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치장은 번드르르 어찌 예산타령만… 제대로 된 책 없이 제대로 된 나라 있나”몇해전 한 지방도시의 도서관이 초청하는 문학강연에 간 일이 있다. 관장은 내가 온다고 해서 책을 찾았으나 도서관에 내 것이 한권도 없어 읽지 못했다면서 상경하는대로 저서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산이 너무 적어 책을 구입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과연 잠시 둘러본 도서관은 웅장한 건물이며 화려한 내부 장식과는 딴판으로 소장하고 있는 책은 너무 보잘 것 없었다. 관장은 계속 예산타령을 했지만 도서관 직원이며 참석자들 50여명이 강연 후 몰려가 먹은 밥값 술값을 포함해 그날 쓴 비용이 200만원이라는 것이 담당직원의 말이었다. 웬만한 시집 1,000부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도 가끔 지방 도서관에서 저서를 기증해 달라는 편지가 온다. 책을 보내주면 대금을 지불하겠다거나 목록을 알려주면 서점에서 구입하겠다고 적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아무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거저 달라는 것이 분명하다. 중고교 도서실에서 오는 편지는 으레 예산타령을 늘어놓은 끝에 책을 보내주면 학생들에게 널리 읽히겠다고 한술을 더 뜬다. 물론 나는 이런 경우 절대로 책을 보내주지 않는다. 겉치장이며 직원 회식할 예산은 충분해도 도서 구입할 예산은 없는 도서관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 도서실이란 것도 그렇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돈을 들여 학생들에게 필요한 책을 비치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이나 유지에게 기증받아 도서실이란 명색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기증하는 측에서 자기에게 불필요한 책을 내놓는 일도 없지 않으므로 학생들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책이 책꽂이를 메우게 된다. 어떤 학교에 들렀다가 교장이 하도 도서실 자랑을 하길래 구경하다가 어떻게 하면 무엇이 강해지고 어떤 데는 무엇을 먹어야 한다는 따위 야릇한 건강서적이 책꽂이를 메우고 있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일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참 책을 우습게 아는구나,이런 생각을 했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책을 업수이 여기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 책을 새로 내면 지인들한테서 전화가 오는데,대개 「책이나 한권」 보내달라는 주문이다. 사보기는 고사하고 기왕 냈으니 보내주면 읽기는 하겠다는 투다. 책을 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문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책은 으레 기증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료 문인의 책을 사서 읽으면 품위가 떨어진다는 생각들인 것 같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르다. 2년전 프랑스에 갔을 때다. 한 세미나에서 함께 얘기하게 돼 있는 저명한 문학평론가이며 패널리스트인 프랑스 사람이 만나자 마자 프랑스에서 나온 내 시집을 내밀고 사인을 청했다. 주최측이나 출판사에서 기증을 받았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서점에서 산 것이었다.
대형 서적 도매상이 잇달아 부도가 나서 출판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아우성들이다. 정부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겠지만,나는 더 필요한 것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바른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주위를 둘러보자. 제대로 된 책이 없는 나라치고 제대로 된 나라가 있는가. 새정부는 문화,특히 영상문화가 갖는 고부가가치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출판에는 별로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책없는 영상문화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책은 모든 문화의 기초요 출발점이다. 출판문화의 붕괴는 곧 영상문화의 불모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귀중한 책을 도서관이고 개인이고 거저 얻을 생각을 버리는 일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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