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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승박덕’/이상호 경제부 차장(앞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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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승박덕’/이상호 경제부 차장(앞과 뒤)

입력
1998.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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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승박덕」이란 옛말이 있다. 재주는 많으나 덕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재승박덕」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돈은 많지만 존경은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요즈음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과소비와 지나친 이기주의 현상이 만들어 낸 새로운 조어다.국제통화기금(IMF) 시대가 시작된지 이제 겨우 100일이 지났다. 멀고도 긴 터널을 막 들어선 것에 불과한데, 언제부터인지 터널을 거의 다 빠져나온 것 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이들은 『우리도 현재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일리가 있다.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IMF 한파로 모든 것이 얼어 붙었다. 환율이 급등하다보니 수출은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수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본을 봐라. 기본적으로 내수가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그 중요한 임무를 우리가 맡겠다. 내수 진작의 선봉에 서겠다. 경기불황이라고 해서 무조건 소비를 줄인다면 경기회복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무장한 이들은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뛰어 다닌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백화점에 가면 대부분이 세일이다. 골프예약도 예전보다 훨씬 쉽다. 저녁에 들린 고급 술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고객은 왕」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렇다고 예전에 비해 돈이 더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고금리라고 해서 이자수입이 크게 늘었다. 돈을 빌려 쓸 일이 없으니 가만히 앉아서 보는 추가 이익이다. 적은 비용으로 더 큰 만족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IMF 시대가 고맙다.

경제위기가 가져올 가장 두려운 것이 「공동체 의식」의 실종이다. 불황이 오래 지속되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구분이 더욱 뚜렷해 진다. 사회를 지탱할 중산층이 몰락한다. 남미 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 쪽에서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된 사람들이 벤치위에서 졸고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공원이 더 붐비고 더러워졌다고 불평하고 있다.

경제난국이 닥쳐온 초기에는 대부분이 스스로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100일이 가지 않았다. 냄비기질이라는 특성이 또 나온 것이다. 경제불황은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IMF의 도움을 받은 나라가 우리 뿐이 아니다. 하지만 한번 무너진 의식은 회복하기가 힘들다. 넉넉한 곳간에서 인심이 나온다고 했다. 「재승후덕」이 이 시대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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