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구걸 온 친척에 “형편없는 선비” 호통 곧 관가에 인사태풍 선현의 기상 본받아야”조선조 이후백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벼슬자리에 사람을 임명할 때 매우 엄격했다. 그런 이후백에게 어느날 친척 한 사람이 찾아와 넌지시 벼슬자리를 부탁했다. 이후백은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그 친척 앞에 책자 하나를 꺼내 펼쳐보였다.
『이 책자는 앞으로 벼슬자리에 내가 추천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벼슬자리를 구걸하러 다니는 형편 없는 선비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내가 어찌 그대를 천거할 수 있겠오』
이후백은 그 자리에서 친척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참으로 통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얼룩진 조선조 역사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 일화가 우리에게 이처럼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엊그제 차관급 인사까지 끝나 새 정부의 진용이 대충 마무리된 셈이다. 곧 이어 정부관련기관, 관변단체 등의 고위급 인사가 개혁차원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이런 시점에서 과연 명예롭고 떳떳하게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부투자기관, 정부출자기관, 정부출연기관, 정부보조기관, 정부지원단체는 몇개쯤 될까? 아마 모르긴해도 족히 300개도 넘을 것이다.
얼마전 감사원이 인수위에 보고한 정부 산하기관 감사결과는 또한번 우리들의 어깨를 처지게 한다. 이들 산하기관들은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손쉽게 번 이익이나 지원금을 자기 배를 불리는데 썼다는 것이 아닌가. 18개 정부투자기관 모두가 제멋대로 임금을 올리고 퇴직자에게는 퇴직금도 듬뿍 쥐어 주었다는 것이다. 체력단련비와 상여금 지급기준을 올리거나 실적급으로 주어야 할 「시간외수당」, 「휴일수당」, 「여비」, 「교통비」 등까지 급여성 인건비로 둔갑시켜 임금을 크게 올렸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자기 배를 불리는 수당도 크게 올렸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변칙적으로 돈을 빼먹고 임금을 올리는데 급급했다면 이것은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임자 없는 돈이니까 너도 나도 함께 정답게 나눠먹었다고? 에이 여보시오! 국민의 혈세가 임자 없는 돈이라니 그런 생각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했겠소. 보나마나지!』
퇴직금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들이 얼마인데 그 사람들은 마치 딴 세상을 사는듯이 시대를 비웃지 않았는가? 국민 앞에 겸손해야할 정치인들이 IMF한파를 외면한채 고급 승용차를 몇천만원씩이나 주고 타는 세상이니 우리가 어디가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모든게 이런 식이니 나라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겠나.
퇴직금 기준도 멋대로 뜯어고쳐 온갖 수당과 상여금까지도 가산해 부풀려 놓았다가 최근 2,3년간 이뤄진 명예퇴직과정에서 정부의 산정기초인 기준 급여의 범위를 넓혀가지고 두툼한 퇴직금 봉투를 안겨준게 사실이라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일부 기관은 퇴직금을 너무 많이 주어 이미 자본금을 잠식한 상태라고 하니 참으로 기가 찰 일이다. 나라 곳간을 갉아 먹는 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효율적이고 방만하게 경영되어온 정부 산하기관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고서는 「작은 정부」도 「개혁」도 공염불이 될 수 있다. 윗물이 맑지 않고서 어떻게 아랫물이 맑기를 바랄 수 있는가? 개혁은 그래서 위에서부터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허탈해 있는 국민들의 힘을 빠지게 하는 이런 일들은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야 한다. 개혁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잘라내서는 하나마나다. 근본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한 인사는 개혁의 열쇠다. 우리 사회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 잡는 일도, 부정부패를 뿌리뽑는 일도 깨끗한 인사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물줄기의 근원을 잘못 자리잡게 하고서야 물살의 흐름을 바로 다스릴 수는 없지 않은가.
쪽빛으로 흐르는 봄의 강물을 보라. 고여있지 않고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은 썩지 않는다. 이제 좀 신바람나는 세상이 와야할텐데 아직도 웬 구름인가. 이젠 좀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되어야 할텐데 웬 IMF한파인가. 하지만 우리는 꿈과 희망을 버릴 순 없다. 조선조 이후백과 같은 청백리가 정부 안팎에 보이고 찬란한 무지개가 떠오르리라. 제아무리 IMF한파가 드높을지라도 우리의 높은 기상, 우리 민족정기 앞에 그런게 뭐 두려울게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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