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최근 언급한 「고삐론」 이 인상적이다. 새 정부의 내각 및 청와대 진용에 개혁과 보수세력이 뒤섞여 있어 국정혼선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대한 그의 답변이 그것. 한마디로 『양측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더라도 대통령이 고삐를 틀어쥐고 최선의 방향을 판단하면 더 큰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는 내용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남에게서 빌리려고 했던 「머리」를 스스로 가진 만큼 조정자이자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한듯 싶다. 실제 대선이후 지난 2개월여 김대통령이 고삐를 확실하게 거머쥔 기수마냥 차별적 리더십을 발휘해왔다는데 이론이 없다.하지만 최근 여야 파워게임 양상으로 치닫는 총리인준 문제의 가닥이 계속 꼬여만 가자 그의 「고삐론」도 적잖이 힘을 잃는 느낌이다. 「초선들의 천국」 같은 한나라당에 국난책임론을 들이대고, 1년간의 허니문기간을 요청해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총리서리체제의 위법성을 지적하는 헌법학계의 목소리도 부담이고, 그러는 사이 한국 신용등급의 하향조정 가능성을 거론하는 국제 신용평가기관은 야속하기만 하다. 정치내각이라는 비판을 뒤로하며 국정 주요포스트에 「옹골찬」 개혁의욕을 가진 인사들을 등용했지만 「서리체제」의 한계는 새로 짜여진 올해 예산안마저 볼모로 잡았다.
김대통령의 「고삐론」이 야당에게 먹혀들지 않는 이유나, 한나라당의 복잡한 속사정은 이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쨌든 현실은 그가 최선의 판단이라고 생각한 김종필 총리 카드가 벽에 부닥쳤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기회있을때 마다 『정치는 이상을 현실에 적응시켜 나가는 것』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말을 강조해왔다. 『정치는 학문도, 공무집행도 아니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방법도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정치에선 절대적 선이나 완벽한 규율을 고집할 수 없다는 뜻일게다. 물론 이 국면에서 법전과 머릿수로 마구 들이미는 야당에 밀리면 가뜩이나 취약한 새 정권의 기반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어줍잖은 승리감에 취해있는 듯한 한나라당에게 박수를 보내고 기대하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지금이야 말로 DJT 회동이 필요한 시점일지 모른다. 공동정권의 상호 신뢰와 동지적 연대가 확실하다면 그 자리에서 못나눌 얘기도 없다. 역시 첫 말은 「물같이 사는 삶」을 좌우명삼았던 김종필 총리서리가 꺼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프로들의 「지혜」가 아마추어들의 「잔꾀」와 같을 수 없고 그 점이 바로 이 정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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