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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혈통론(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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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혈통론(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8.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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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직후 3·1절 기념사를 통해 새 정부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면서 임정혈통론을 제기했다. 새 총리 인준의 파동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리기는 했지만, 새 정부가 출범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한 제일성이고 보면 그냥 흘려 보낼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김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국민은 3·1운동의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해에서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인 민국이었다. 그로부터 79년후인 지난 2월25일 이 나라에는 다시 한번 국민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50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국민에 의해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룩된 것이다. 이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시가 실현된 것이다. 이 정부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받드는 유일한 합법정부다.』

 김대통령의 선언대로라면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들은 모조리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무관한 비합법정부가 된다. 더구나 김영삼정부도 상해 임정요인들의 유해를 모셔오면서 문민정부야말로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정부라 자칭했다. 그래서 김대통령의 주장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김대통령 자신이 해명을 했다.

 『정부수립 이후의 정부는 다 법적인 정통성 문제는 없다. 다만 정신적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 이 정부가 유일하게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민주공화국 정신을 이어받은 정부는 처음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전문이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적어도 헌법을 유린하지 않은 합헌적인 정부라면 그 정부는 이 헌법 전문의 보장을 받은 정부다. 그 사실을 부인한다면 오히려 그 자체에 위헌의 소지가 있다. 물론 김대통령의 설명대로 최초의 평화적 여야정권교체를 강조하기 위한 조사이기는 했겠지만 역사 인식에 혼선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정권교체가 곧 민주주의라는 도식에서 발단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기간때부터 내내 이 도식을 공리처럼 외쳐 왔다. 사실 50년만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는 우리의 민주정치사에 한 위업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권교체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절차만 정당하다면 정권교체도 민주주의요 정권승계도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순도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그 최초성이 시범적 가치를 더할 뿐이다. 정권교체를 했다고 해서 진정한 국민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정부를 선택한 국민은 진정한 국민이 아니란 말이 되어버린다. 임시정부의 혈통을 이어받은 순종이다 아니다 하는 논의는 이래서 무의미하다.

 문제는 더 근본적인 데 있다. 역사에 대한 자세다.

 우리나라의 역대 정권들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내세우느라 역사를 이용해 왔다. 전정권들을 부인함으로써 역사를 단절시키는가 하면 정권이 자기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기도 전에 지나간 역사를 빌려 자기 역사를 미리 꾸미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심지어는 지나간 역사에 함부로 손을 대면서까지 자기 정부의 위상을 정립하려고 한다. 김영삼정부의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도 그 일환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사는 역사에 손대는 역사였다. 부관참시의 역사였고 신원의 역사였다. 그래서 사화의 나라였다. 역사를 자기류로 해석하고 그것을 정권의 합리화에 견강부회시키는 것도 결국은 역사에 손을 대는 일이다. 역사해석의 독선이나 독주는 정권의 독선이나 독주만큼 위태롭다.

 국사는 자서전이 아니다. 한 정권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 역사의 물줄기를 자기 논에만 끌어 대려고 해서는 안된다. 거기서 역사의 농단이 생기고 독단이 생긴다. 정부는 지나간 역사를 끌어당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세초되지 않을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다. 역사의 창조에 실패하면 아무리 혈통이 순수하다 하더라도 그 정권의 정통성은 무너지고 만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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