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주총은 기업 거수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주총은 기업 거수기?

입력
1998.03.04 00:00
0 0

◎기업 최고의 의사결정기구는 허울뿐 총회꾼과 박수부대 등이 동원되어 경영진이 만든 각본을 그대로 추인 ‘짜고치는 고스톱’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기업 최고의 의사결정기구 주주총회. 그러나 이는 상법상의 지위일 뿐이다. 한국기업의 주총은 유명무실한 「통과위원회」로 전락한 지 오래다. 모든 결정은 오너를 중심으로 한 집행부가 한다. 주총은 이들의 각본을 추인하는 「거수기」에 불과하다. 실질적인 경영평가과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너와 경영진이 전횡을 일삼고 기업이 부실덩어리로 변해도 기업의 주인인 대다수 주주들은 무력할 뿐이다.

 지난해 재벌계열 S사의 주주총회장. 회의장의 절반은 회사 배지를 단 직원들과 돈으로 고용된 총회꾼들이 차지했다. 주총장 앞자리를 빼앗긴 소액주주들은 뒷편으로 밀려나거나 회의장 밖을 서성였다. 주총은 상정된 의안에 대한 질문이나 이의제기 한번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총회꾼과 회사직원들이 『경영실적이 좋다』 『원안대로 통과시키자』고 바람을 잡고 박수부대가 곳곳에서 『재청』을 외쳤다. 회의는 30분만에 「순조롭게」 끝났다.

 이같은 주총 풍속도는 어느 기업이고 거의 예외가 없다. D증권사에 근무하는 김모씨의 말. 『주총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주총이 다가오면 총무부에서 입심좋은 직원들을 동원, 주총 예행연습을 시킨다. 각자 발언순서가 정해지고 박수부대도 동원된다. 이들은 주총장 요소요소에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항의하려는 소액주주들에게 「조용히 해라」 「그냥 넘어가자」며 발언을 막는다』

 일반주주는 말 한번 하기 힘들다. 최근 모은행 주총에서는 의장이 총회꾼과 직원의 사진을 펴놓고 이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어이없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니 회사의 주인인 일반주주들은 외려 「귀찮은 손님」 취급을 받는다. 지난해 모자동차판매회사 주총에 참석했던 소액주주 강모씨의 경험. 지방에서 주총을 한다고 해 교통편을 문의했더니 직원이 『당신은 누구냐』 『왜 오려 하느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주총장에서 발언을 하려 하자 뒤에서 『야! 너 앉아』 『시끄러워』하는 고성이 터져나와 말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전년도 영업보고와 감사보고, 재무제표에 대한 평가와 승인은 「면죄부」를 주는 절차에 그친다. 회사의 운영지침인 정관변경과 이사 및 감사 선임도 오너 마음대로다. 총회꾼들이 나서 『경영상 당연히 필요한 조치』 『회장의 복안대로 선임해 달라』고 바람을 잡는다. 주총에 걸리는 시간은 30∼40분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표결절차도 없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반대 한 명 없는 「만장일치」 통과가 90%를 넘었다. 반대가 있더라도 표결절차를 거친다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재벌 계열사인 K사는 얼마전 타계열사와의 합병승인을 위한 임시주총에서 필수사항인 주주표결절차를 거치지 않고 의안을 통과시켰다. 명백한 위법이지만 얼렁뚱땅 넘어가 버렸다.

 이같은 주총분위기는 최근 변화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역부족이란 평이다. 얼마전 주주들의 이의제기로 정관개정안이 변경통과돼 파란을 일으켰던 모시중은행 주총도 실제는 사전각본에서 크게 벗어난 게 아니었다. 형식만 이의제기였을 뿐 대주주간 막후합의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증권감독원 김영재 기업재무국장은 『우리 기업의 주총은 경영에 대한 평가와 책임추궁 없이 오너가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통과의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도 『주총결과가 집행부 의사에 반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사진을 선임하고 의안을 통과시키려는 오너의 방침에 일체의 비판이나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주총이 「거수기」가 아닌 칼날같은 「비판의 장」이 되지 않고서는 오너의 전횡과 기업의 부실화는 막을 방법이 없다.<배성규 기자>

◎어느 상장사의 주총 의사록

사회자=제15기 정기주총을 시작하겠습니다. 의자은 L대표이사께서 맡아 주시겠습니다. 오늘 주총에는 발행주식 549만주중 329만주가 참석했습니다.

의장=심의에 필요한 의결주식수가 되었기에 총회성립을 선포합니다.최근 어려운 가운데서도 매출 900억원대의 고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올해도 전년대비 30% 고성장 목표를 이루겠습니다.(후략)

사회자=다음은 영업보고가 있겠습니다.

주주 O씨(총회꾼)=긴급동의 있습니다. 오늘 본인이 첫번째로 발언을 하게 돼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집행부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영업보고 내용은 배부된 유인물에 자세히 기록돼 있으므로 유인물로 대체할 것을 동의합니다.(곳곳에서 「재청합니다」고 소리침) 의장=이의 없으면 영업보고는 유인물로 대체하고 감사보고가 있겠습니다.

감사=감사 결과 이사의 직무집행에 중대한 부정이나 위법사항을 발견 할 수 없었고 회계 재무제표도 적정함을 보고합니다.

사회자=다음은 부의 안건 심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의장=제1안인 대차대표 및 손익계산서 승인의 건과 제2안인 이익잉여금 처분계산서 승인의 건을 함께 상정합니다.

주주 M씨(총회꾼)=본 주주는 지난 1년간 회사발전에 노고가 많으신 의장 및 임직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도 영업실적이 양호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의안을 집행부가 제시한 원안대로 승인할 것을 요청합니다.(「재청」「찬성」의 목소리 많음)

의장=이의 없으면 원안대로 통과시키겠습니다. 다음은 정관변경의 건입니다.(설명중 「긴급동의」 요청 들어옴)

주주 N씨(회사 직원)=이번 정관개정은 필요하고 적절한 조치라 판단되므로 원안대로 통과시킬 것을 동의합니다.(「재청합니다」는 주주 많음)

의장=원안대로 통과되었습니다. 다음은 이사 및 감사 선임의 건입니다.

주주 K씨(회사 직원)=임원에 대해서는 의장님께서 잘 아실테니 의장님의 복안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별한 이의가 없다면 주주 여러분의 박수로 가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곳곳에서 「그렇게 하세요」 「좋습니다」는 목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옴)

의장=감사합니다. 집행부의 복안대로 이사와 감사를 발표하겠습니다.(이사와 감사발표 및 신임이사진의 인사) 다음은 이사 및 감사 부수결정의 건입니다.(중략) 전년보다 3억원 많은 10억원으로 상정합니다.

주주 Y씨(총회꾼)=집행부의 지난해 실적과 근무태도로 보아 금년에도 잘하리라 생각하며 의장의 원안대로 통과시킬 것을 동의합니다.

의장=감사합니다. 이의 없으면 통과시키겠습니다. 주주 여러분 수고 많았습니다. 이로써 정기주총을 폐회하겠습니다.(의사진행시간 40분,중소기업 K사의 지난해 주총의사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