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불황에 도매상부도 발행·판매·유통 모두 마비/공공도서관 도서구입 확대/출판기금 조성 서둘러야 인문과학분야의 양서를 많이 내는 I출판사 L사장은 요즘 잠을 못 잔다. 지난달 초 서적도매상 송인의 부도로 5,000만원이 물렸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그러나 2일 국내 최대도매상 보문당이 최종 부도처리되면서 2억원의 어음마저 휴지조각이 되는 바람에 더 버텨나갈 의욕을 잃었다. 지식산업의 뿌리, 출판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96년부터 불황에 시달려온 출판계는 IMF(국제통화기금) 한파까지 겹쳐 사상 유례없는 위기에 빠졌다. 서적도매상의 연쇄부도는 출판사로 이어져 학문 과학 기술 문화의 토대가 송두리째 붕괴될 위기다.
출판계에서 주장하는 출판살리기 방안은 정부의 출판기금조성, 공공도서관의 도서구입비 확충으로 요약된다. 출판인들은 당장 정부가 일정규모의 출판기금을 조성, 출판사 경영과 유통구조의 개선을 이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출판연구소 김경희(지식산업사 대표) 이사장은 『정부가 출판진흥기금으로 1,000억원 정도를 지원, 유통망 회생등 출판살리기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길사 김언호 사장도 『당장의 위기가 심각한 만큼 정부에서 긴급자금을 지원, 도매상 연쇄부도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부지원을 토대로 전국적으로 100개 이상 난립한 도매상을 통폐합, 대형화하는 것만이 출판사 뿐 아니라 도매상도 살길이라고 출판계는 주장한다.
공공도서관의 도서구입비 확충은 특히 학술서적등 판매부수가 제한적인 출판활동에 도움을 준다. 일본출판뉴스사 97년도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명당 공공도서관 수는 스웨덴 19.7개(총 1,734개) 독일 17.2개(1만4,019) 영국 8.9개(5,185) 미국 5.9개(1만5,346) 프랑스 4.7개(2,740) 일본 1.7개(2,172). 우리나라는 모두 합해야 30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연간 도서구입비 수준은 외국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올해 정부에서 국립중앙도서관과 전국 시·군단위 도서관에 자료구입비로 지원하는 예산은 약 32억원에 불과하다. 까치출판사 박종만 사장은 『출판의 핵인 학술출판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선진국처럼 도서관에서 일정부수 이상을 구입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출판계는 3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신간발행과 판매는 급감하고 유통은 마비상태다. 이 달 또는 4월까지 출판사가 줄줄이 도산하는 「출판대란」설까지 나돌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출판사들은 올 1월 한달간 참고서와 어린이책을 포함해 모두 1,782종을 발행,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종수 면에서 26%가 줄었다. 발행부수도 495만2,299권으로 60.7%나 격감했다. 그러나 이 통계는 납본기준이고 체감지수는 50% 이상 줄어들었다. 반면 책값은 평균 1만2,070원으로 1년전보다 20.8%나 올랐다. 잡지쪽 사정은 더 심각하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세계의 문학」 「문학동네」 등 계간지는 이번 봄호에서 200∼300쪽을 감면했다. 몇몇 잡지의 경우 지면은 줄었는데 값은 오히려 올랐다. 학술잡지는 아예 정간하거나 발행 횟수를 줄였다.
출판위기의 본질은 96년부터 계속된 불황에 느닷없이 불어닥친 IMF한파, 그리고 도매상 연쇄부도 때문이다. 환율급등과 펄프값 상승이 맞물리면서 종이값은 지난해 10월 이후 70% 이상 뛰었다. 인쇄·제판·제본비 및 필름값도 리스비용 및 원자재값 상승으로 100% 가까이 폭등했다. 그나마 현금을 주지 않으면 종이 구하기는 물론 인쇄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것이 도매상 연쇄부도. 단행본의 도매점유율 9.7%를 차지하는 보문당의 부도는 엄청난 파장을 주고 있다. 출판사들은 돈을 떼일 것을 우려해 도매상에 신간을 주지 않고 이에 따라 소매점도 책을 공급받지 못하는 공황상태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이광일·하종오 기자>이광일·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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