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내각→개혁내각 등 두세차례 인선변화 새 정부의 조각은 파도를 타듯 두, 세 차례 변화를 겪었다. 금년초 외환상황이 심각했을 때는 경제내각, 전문가의 발탁이 우선시 됐다가 외환위기가 진정되고 경제실정, 과거 비리의혹이 부각되면서 개혁성이 강조됐다.
이 과정에서 여권내 신구 세력간 갈등도 있었다. 심지어 『고생은 누가 하고 떡은 누가 먹냐』는 비난이 나왔고 『잿밥에만 신경쓰면 YS정권처럼 실패한다』는 응수도 있었다. 양론 속에서 김대통령이 정치내각을 택한 결정적 계기는 「JP총리 파동」이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야당이 수의 논리로 밀고 나오면서 강한 내각, 강한 장관론이 대세를 이뤘다』고 말했다. 로비와 견제도 치열했다. 국민회의의 한 중진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정책보고서를 제출하며 특정부처의 등용을 호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다른 중진은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경합자의 비리, 결격사유를 적은 자료를 넘겨 주려다 거절 당했다.
우여곡절이 가장 많았던 자리는 재경장관. DJT 3인 모두 자민련 김용환 의원을 낙점하려 했으나 본인이 완강히 고사, 한때 김대통령의 노여움까지 샀다는 후문이다. 김의원은 이규성 전 재무장관을 천거했으나 투신사 부실의 책임론이 대두돼 백지화할 뻔 했다.
통일장관은 김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자민련 박철언 부총재가 유력했으나 자민련의 내부 견제로 밀렸다. 대신 김대통령의 조언자로 북한문제 전문가인 강인덕 통일장관이 발탁됐다. 주변인사들도 예측 못한 의외의 인사였다. 외교통상장관은 외무부의 파벌개혁을 위해 외부인사의 투입이 필요하다는 중론에 따라 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가 일찍이 내정됐다. 박상천 법무, 이해찬 교육장관의 기용도 외부개혁의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천용택 국방장관은 대선때 북풍을 차단하는 등 안보참모 역할을 잘 해내 조기에 확정된 케이스. 행정자치장관은 하루 전까지도 한광옥 노사정위원장이 유력했으나 PK이면서도 줄기차게 DJ를 택한 김정길 전 의원이 발탁됐다. 강창희 과학기술, 이정무 건교장관은 김용환 의원의 당잔류 결정으로 역할분담에 따라 입각했다.<이영성 기자>이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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