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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병과 대처:하(국난극복과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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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병과 대처:하(국난극복과 리더십)

입력
1998.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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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노조와 1년 싸움 “파업시대 종말”/2명 사망 5,800명 체포 공룡노조 끝내 굴복/포클랜드전 승리 ‘수에즈패배 신드롬’ 일소/“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 통치철학 심어 『누가 국가를 통치하는가? 정부인가, 탄광노조인가?』 집권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74년 2월 총선에서 내건 구호였다. 전국을 휩쓴 총파업으로 위기에 처했던 보수당의 상대는 노동당이 아니라 탄광노조였다. 선거결과는 영국을 통치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탄광노조라는 점을 입증했다. 노조와의 타협책을 제시한 노동당의 해럴드 윌슨이 승리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연료가 석유로 급속히 대체되면서 국영석탄회사들의 채산성은 악화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래 영국 노동운동의 핵심이 돼 온 탄광노조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83년 재집권한 대처는 이 「거인」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대처는 74년의 패인을 잘 알고 있었다. 에너지의 4분의3을 석탄에 의존했고 석탄비축량은 3주일분에 불과했던 상황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석탄 의존도는 3분의1로 낮아졌다. 게다가 대처는 준비돼 있었다. 비축된 석탄은 영국내 화력발전소를 1년간 돌리고도 남았다. 대처는 84년 3월1일 칼을 빼들었다. 영국석탄공사는 코튼우드의 요크셔탄광 폐쇄를 발표했다. 이어 20개 탄광폐쇄와 2만명의 노동자 감축계획이 뒤따랐다. 상대는 74년 파업시 탄광노조부위원장을 맡았던 아서 스카길 위원장. 그는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앞으로 4년간을 또 이 정권아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청을 높여왔다. 스카길은 단순한 노조위원장이 아니라 대처에게는 「체제위협세력」이었던 것이다. 스카길은 일주일만에 전면파업으로 대응했다. 대처는 협상대표 대신 경찰을 파견했다. 5,000명이 넘는 시위대와 그에 맞먹는 경찰이 오그리브 제련소에서 충돌했다. 벽돌과 몽둥이가 난무했고 69명이 중상을 입은 혈전이었다. 다음달 대처는 TV앞에 섰다. 『법의 논리는 폭도들의 논리에 제압될 수 없다』 꼬박 1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대처의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고용법을 개정, 노조원 투표없이 실시된 파업을 불법화했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탄광을 국민세금으로 보조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이며 결과적으로 실업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대처의 설득이 탄광노조원들을 파고 들었다.

 마침내 85년 3월3일 탄광노동자대표자회의는 투표를 통해 직장으로 복귀할 것을 결정했다. 2명이 숨지고 5,800명이 체포된 전쟁은 막을 내렸다. 탄광노조가 대처로부터 얻어낸 것은 단 한가지도 없었다. 2세기에 걸쳐 영국의 탄광노동자들이 건설한 강력한 노조는 「철의 여인」 대처앞에서 이렇게 무너졌다. 탄광노조의 굴복은 파업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대처가 집권한 79년 2,125건에 달했던 파업은 85년 903건으로 급격히 줄었다. 대처는 한번의 승리에 만족하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80년 노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고용법은 84년까지 이미 두차례 개정을 통해 더욱 강화했다. 대처는 90년 물러나기까지 두번이나 더 고용법을 손질했다. 노조의 면책권은 완전히 박탈됐고 반노조의 자유와 권리는 확대됐다. 70년대 영국을 휩쓸었던 파업의 열풍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96년 파업건수는 불과 244건) 영국의 권력은 비로소 노조로부터 정부로 옮겨졌다. 대처의 리더십도 완전히 인정을 받게 됐다.

 대처가 노조라는 거인과 맞서 승리하고 집권기간에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실제의 전쟁에서 얻은 자신감 덕이었다. 82년 4월2일 아르헨티나군이 자신들의 옛 영토 포클랜드를 「침공」했다. 영국인들 가운데서도 제국주의 식민시대에 얻은 영토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꺼림칙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에 발을 딛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대처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대처는 영국의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영국 함대에는 도버해협에서 1만3,000㎞ 떨어진 남미대륙의 남단에 떨어진 포클랜드섬으로 출전명령이 내려졌다. 프랑스제 엑조세 미사일에 구축함 쉐필드호가 침몰되는 희생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6월14일 포클랜드 수도 포트 스탠리에서 저항하던 아르헨티나군은 백기를 올렸다. 대처는 훗날 자서전에서 『포클랜드는 나의 살과 피가 됐다』고 고백했다. 영국은 50년대 수에즈운하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군사개입을 했다가 실패하고 이든 내각이 붕괴한 쓰라린 기억이 있었다. 포클랜드의 승리는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수에즈 신드롬」을 말끔히 씻어줬다.

 탄광노조와 아르헨티나. 이 둘은 대처가 거꾸러뜨린 두가지 적이었다. 하지만 대처가 평생 타깃으로 삼았던 보이지 않는 적이 있다. 다름아닌 「합의 정치(Consensus Politics)」의 전통이다. 85년 1월 탄광노조 파업당시 자유당의 데이비드 스틸 당수는 의회에서 대처를 향해 『영국의회의 미덕인 합의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외쳤다. 대처는 그자리에서 맞받았다. 『합의정치의 이름아래 국가의 장래를 압력단체의 이해에 종속시킨 것이 당신들이다. 나는 대결의 정치를 바란다』 스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처는 결국 탄광노조와 아르헨티나전쟁에서 합의정치도 무너뜨렸다. 대처집권 10년만에 영국사회에서 합의정치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합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다줬던 편안함 대신 치열한 경쟁이 자리잡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를 경쟁자로 삼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모두들 불편해 했지만 사회의 효율은 높아졌다.

 대처의 리더십과 추진력은 성장과정에서 몸에 밴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처는 영국 사회에서 중하류로 분류되는 식품점 주인의 딸로 태어났다. 식품배달을 도우며 몸에 밴 생활철학은 곧 그의 통치철학이 됐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돈을 벌 수 있고 벌어야 한다」. 대처 고향 그랜덤에선 평범한 상식이었다. 그래서 영국사람들은 대처의 고향 이름을 따 대처리즘을 「그랜덤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는 재정적자문제가 나올 때마다 되묻곤 했다. 『현명한 주부들은 수입을 초과하지 않는 지출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주부들도 해내는 일을 왜 정부는 못한단 말인가』 국가의 재정이 적자에 허덕이는 것은 국민들이 필요이상의 것을 정부에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게 대처의 생각이었다. 국민들이 열심히 자기일을 해결하면 재정적자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대처는 한국방문시 『나는 여러 부문에서 「노(No)」라는 한마디를 되풀이해 왔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다져온 삶의 방식에 비추어 틀린 것에 대해선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대처였다.

 대처는 「리더십」과 「독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재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사욕을 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처는 93년 일본을 방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중에게 영합해서는 안된다. 지도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하면 국민은 으레 따라오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항상 「으레」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89년 주민세(속칭 인두세)도입은 대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아이가 서너명씩 딸린 가난뱅이가 대저택에 혼자 사는 부호보다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모순은 지나친 것이었다. 대처의 인기도는 81년보다 더 떨어진 23%를 기록했다. 81년과 달리 11년의 세월은 국민들에게 변화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80년대 말부터 물가가 오르고 실업률도 높아지는 등 경제여건도 악화했다. 유럽통합에 대한 강경한 반대로 국제적 고립이 심화했다. 대처는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물러설 때를 아는 대처에게 영국인들은 더 큰 박수를 보냈다.

 대처리즘 11년에 대한 평가는 아직 미완이다. 영국의 보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대처퇴임 직후 「그녀의 결정은 대부분 옳았다」는 평가를 내렸다. 82∼88년 국내총생산(GDP)성장률이 연평균 3.7%를 기록했다. 유럽연합(EU)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였다. 물가상승률도 한자릿수로 정착됐다. 하지만  이 기간 영국 최하층 가계의 평균소득은 43%가 줄었다. 상류층은 오히려 11%가 늘어났다. 영국 정부가 파악하는 「절대빈곤」 상태의 국민수는 79년 600만명에서 86년 1,170만명으로 늘었다. 「부자에게 당근을 주고 빈자에게 채찍을 주는」 대처리즘이 가져온 결과였다.대처가 물러나던 날 한 영국시민은 『대처리즘을 박물관에 넣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대처리즘을 이루는 정책들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대처의 리더십에 대한 찬사와 요구는 박물관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다.<김준형 기자>

◎대처의 별칭들/소 언론서 처음 “철의 여인” 호칭/본인 매우 좋아해/아동급식 유료화에 시위대 “우유 약탈자”/“독선에 빠진 암소”“매력적 여인” 엇갈려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별칭으로 남는다. 대처 총리 역시 정계에 입문해서 총리직에서 사임하기까지 다양한 호칭과 평가가 따라 다녔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철의 여인(Iron Woman)」. 76년 1월 세계는 데탕트(화해)의 무드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보수당 당수였던 대처는 켄징턴 타운홀 연설에서 소련에 대해 무차별적인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소련 언론들은 대처를 처음으로 철의 여인이라 불렀다. 영국의 처칠수상이 2차대전후 소련을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고 부른데 대한 응수인 셈이었다. 대처는 이 호칭을 대단히 좋아했다. 『영국은 철의 여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대처의 반응이었다.

 대처가 처음으로 얻은 정치적 별명은 「우유 약탈자」였다. 70년 교육부장관에 임명될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무료로 우유가 제공되고 있었다. 대처는 재정지출삭감을 위해 7∼11세 아이들에게 우유값을 받도록했다. 런던시내에 「대처=우유약탈자」라는 시위대의 플래카드가 물결쳤다. 하지만 대처는 이때부터 이미 반대자들에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85년 대처와의 대결에서 무릎을 꿇은 탄광노조는 대처를 「독선에 빠진 암소」 또는 「냉혈한」이라고 직선적인 저주를 퍼부었다. 「도자기 가게에 풀어 놓은 반노조 황소」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미국 옥스퍼드대 철학과 알렉산더 조지박사는 대처를 「망해 가는 종가집의 맏며느리」라고 평했다. 변변치 않은 남자들 때문에 망해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여성이라는 의미였다. 보수당의 에반 코베트경도 『살림을 맡게 되자 집안 대청소부터 시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마를린 먼로의 입술을 지녔지만 로마시대 폭군 칼리굴라의 눈을 지닌 인물」이라고 했다. 그의 가정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처와 가장 죽이 잘 맞았던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매우 매력적인 여성』으로 대처를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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