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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사의 수사학(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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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사의 수사학(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8.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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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취임식에 비해 행사가 다채로웠다. 행사가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그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신임 대통령의 취임사일 것이다. 온 국민이 이 취임사만큼 경청하는 연설도 없을 것 같다. 취임사는 대통령으로서 가장 많은 귀에 대고 말하는 맨 처음이자 가장 큰 목소리의 말씀이다. 취임사에는 신임 대통령의 국정방향은 물론 통치이념과 국가경영 철학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국민을 이끌고 갈 길을 가리켜 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용기와 의기를 고취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자면 적확하고 신실한 언사와 함께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표현이 요구된다. 이것은 수사학의 영분이다.

 미국 대통령들의 취임사를 보면 미사들이 많다.

 『우리가 오로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명한 말은 1933년 그의 첫 취임연설에 나오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의 취임연설에서 『우리 미국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라고 한 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의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고함치는 것을 그칠 때까지는 서로를 알 수 없고 우리의 목소리뿐 아니라 우리의 말이 들릴 수 있을 만큼 조용히 말을 할 때까지는 서로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당시 대통령들이 취임 연설에서 내세웠던 정책들은 다 잊어버리고 명구들은 두고 두고 명언집에 전해져 온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작년 1월 클린턴 대통령이 연임하면서 행한 취임 연설이 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새로운 약속의 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구체적인 정책보다는 포괄적인 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가 연설도중 우렁찬 박수를 받은 것은 이런 구절들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오랜 민주주의를 영원히 젊은 민주주의로 간직해야 합니다.』

 『선조들이 신대륙에서 찾고자 했던 약속을 우리는 새 약속의 땅에서 다시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부의 역할에 관한 이 시대의 대논쟁을 마무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언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문제가 아니며 해답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미국 국민인 우리가 해답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취임사는 대체로 국정의 기본정책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는데 그치는 경향이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사에서 저마다 하나씩의 비전을 구호로 내세우기는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복지국가건설」,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의 새시대」, 김영삼 대통령은 「신한국의 창조」, 그리고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다.

 그러나 가령 「국민의 정부」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 정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참된 「국민의 정부」인 것을 저는 이 자리에서 4,500만 국민앞에 선언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마침내 국민에 의한,국민의 정부를 이땅에 세웠습니다』라고 했다. 그뿐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도 같은 말을 했다.『이 시각에 탄생하는 새정부는 바로 국민이 주인이 된 국민의 정부임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레토릭의 발상이 엇비슷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도중 목이 메인 대목이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였다. 상황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신한국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눈물과 땀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따릅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가장 수사적이었던 말은 『반만년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얼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뒤 『후손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원고에도 없는 말을 즉석에서 덧붙인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후손의 눈초리를 의식하는 나라야말로 눈을 바로 뜬 나라다.

미사는 단순한 허사의 수식이 아니다. 미사에는 미적인 정신이 들어 있고 그 정신이 빛처럼 국민의 마음을 감광시킨다. 국정방향이 대낮처럼 환한 광명의 취임사 못지않게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명언의 취임사를 듣고 싶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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