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벌써 IMF 체제의 공포를 잊었는가. 기업의 부도사태가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대량실업 시대가 시작됐는데, 서울에는 흥청망청하던 옛 모습이 하나 둘 되살아나고 있다. 자동차 운행자제로 한산하던 거리가 다시 자동차 홍수를 이루고, 유흥가는 밤늦도록 취객들로 시끄럽다. 얼마전 매장을 치우느라 법석을 떨던 백화점 외제 화장품 코너가 되살아난다는 보도이고, 외제품할인매장들은 넘쳐나는 고객으로 계산대 앞에 긴 줄을 서는 곳이 많다.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요즈음 남산 1,3호터널 하루 통행차량수가 7만6,000∼7만7,000대로 지난달보다 3,000∼5,000대 늘었다. 유료도로 이용차량이 이렇게 늘었다면 다른 도로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올림픽대로 성산대교 같은 곳의 정체 정도가 옛날과 다름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동차가 늘어난 이유는 우리 민족의 냄비근성을 또 한번 드러내는 것같아 서글프다.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대학졸업식 같은 계절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는 하나 자동차가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휘발유값이 ℓ당 50원 내린 것이라고 서울시는 분석하고 있다. 휘발유값이 불과 몇달 사이 배나 올라서 ℓ당 1,200원 가까운데, 50원 내렸다는 사실이 IMF의 긴장을 풀게 한 것이다. 중형차의 경우 출퇴근에 소요되는 월간 연료비가 만만치 않은데 이를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면 국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색해진다. 외채상환을 앞당기자고 달러와 금붙이 모으기 국민운동이 벌어지고,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불필요한 등을 끄고, 실내온도를 낮추어 내핍을 아무리 생활화해도 가진 사람들이 분위기를 흐려놓으면 국민운동은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국제원유가 하락으로 휘발유값이 추가인하되면 교통량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소리도 들린다. 24일 런던 국제 석유선물거래소의 석유시세는 94년 3월말 이후 최저가인 배럴당 14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산유국들이 석유 생산량 상한선을 늘린데다, 최근 유엔과 이라크가 무기사찰에 합의해 중동사태가 진정국면으로 들어선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275억2,000만달러를 원유 수입에 썼다. 우리가 갚아야 할 외채가 1,895억달러로 추산되고 있으니 에너지 부문에서 연간 100억달러만 절약해도 IMF 졸업은 그만큼 앞당겨질 수 있다.
전체 석유 소비량에서 자동차 연료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때 거리마다 자동차 홍수를 이룬다면 우리 국민의 고난극복 의지가 얼마나 박약한지를 보여주는 증표가 된다.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부자나라 사람들도 출퇴근에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는 자동차 세제 개편, 비효율적인 에너지 소비구조 개편 등 강력한 에너지 절약대책을 세워 지속적으로 밀고나가기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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