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스스로 자신을 구제해야 합니다”/76년 IMF 구제금융 불구 더 깊은 수렁으로/79년 총리취임 ‘셀프 헬프’ 대처리즘 출발/“인기보다 용기”로 3년후 경제 소생의 빛 『이 나라가 영국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76년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신문이 「영국병」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도, 「유럽의 병자」라는 영국의 별명이 일반화한 것도 이때였다. 훗날 대처정권의 경제정책수단이 된 통화주의를 창안한 밀턴 프리드먼 조차 『영국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 나라』라는 평가를 내렸다. 산업혁명당시 유럽 산업생산의 3분의2를 차지했던 영국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변화한 국제 정치·경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30년간 쇠퇴를 걸어온 끝에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다. 외국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외환보유고도 바닥났다. 76년 11월. 파운드화 방어를 포기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9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얻어야 했다. 외환위기는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근본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영국경제는 더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78년 영국의 겨울은 혹독했다. 200만명을 넘어선 실업자들은 살을 에는 추위속에 거리에서 분노의 함성을 토해냈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도시기능은 정지됐다. 길거리엔 쓰레기가 넘쳐났고 병원에는 장례를 기다리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더 타임스같은 권위있는 신문도 1년넘게 발행되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이때를 「절망의 겨울」로 기억한다.
이듬해 3월 311대 310, 단 한표차이로 집권노동당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통과됐다. 이어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했지만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거릿 대처는 5월4일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로 입주하며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로 총리로서의 첫 연설을 대신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영국역사상 첫 여성총리라는 영광보다는 무너져내리는 조국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부담에 대처의 표정은 마냥 밝을 수만은 없었다.
대처가 취임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요구한 것은 「셀프 헬프(자조)」였다. 스스로 일어서지 않는 자에게 더이상 「공짜점심」은 없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정치가의 일도 아니다. 국민들은 이제 스스로 자기자신을 구제해야 한다』 총리가 되기 훨씬 전인 75년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한 이 연설에서 이미 「대처리즘」은 시작되고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사회복지제도에 익숙해져온 영국인들에게 이같은 요구는 엄청난 고통(빅 페인·Big Pain)을 의미했다.
죽어있던 시장기능을 되살려 경제의 효율성을 찾기 위한 거대한 작업이 시작됐다. 「빅토리아(산업혁명기)시대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20세기초 이래 영국이 건설해온 비대한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경쟁사회를 부활하자는 것이었다.
공공부문축소가 첫 타깃이 됐다. 사회복지예산과 주택지원지출이 줄었다.
대처의 생각은 확고했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까지 국가가 보살펴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회복지혜택을 받고 생활하던 저소득계층에게 대처의 등장은 곧 재앙이었다. 대처는 또 집권 첫해 국영 영국석유회사 주식 2억8,000만파운드를 팔아치운 것을 시작으로 국영기업 민영화에 박차를 가했다. 팔리지 않은 국영기업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대폭 줄였다. 민영화와 지원감축과정에서 200만명에 달하는 국영기업 근로자들은 해고와 감봉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경쟁력없는 국영기업체들은 아예 폐쇄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80년 쇼튼 코비 클리블랜드 등 3곳의 국영제철소가 폐쇄됐다. 영국의 자존심 롤스로이스를 생산하던 리랜드자동차도 수년간의 구조조정을 거쳐 GM과 포드에 분할 매각했다. 공무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것 하나 희생이 따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80년 고용법제정을 통해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에 제한이 가해졌다. 금융부문 개혁의 선두에는 제프리 하우 재무장관이 앞장을 섰다. 그는 통화증가를 최대한 억제하고 임금 물가 분배등을 정부간여없이 시장에 맡겼다.
파산과 실업의 어두운 그림자가 대처 취임과 함께 영국을 휩쓸었다.
반면 대처는 근로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소득세를 대폭 낮췄다. 당시 영국은 기본세율에 추가세를 포함하면 최고 98%의 세율이 적용되고 있었다. 취임첫해 소득세 기본세율을 33%에서 30%로 낮춘 것을 시작으로 세금인하는 집권기 내내 이뤄졌다. 공영주택의 민영화도 적극 추진했다. 공영주택을 싼값으로 세입자들에게 불하함으로써 내집을 가진 「유산계급」을 늘리고 재정수입도 늘리겠다는 발상이었다. 대처는 대중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를 꿈꾸고 있었다. 국민들이 기업의 주주가 되고 자신의 집을 소유하는 것. 이것이 대처가 그렸던 대중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공영주택 불하는 공기업 민영화와 더불어 대중자본주의를 구현하는 수단이 됐던 것이다.
대처는 훗날 『대처리즘의 철학은 영국 국민의 가치와 직업윤리,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지키려는 마음을 기초로 탄생했다』고 말했다(92년 방한시 강연). 그러나 당시 노동자를 비롯, 진보진영과 많은 지식인들의 눈에 대처의 철학은 영국국민의 가치와 직업윤리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복지지출삭감, 작은 정부, 세금감면, 노조의 정치활동 제약, 국영기업 민영화 등 대처리즘의 핵심을 이루는 정책들에 의해 이제껏 영국이 쌓고 누려왔던 「정의」와 「자유」의 개념은 크게 흔들리게 됐다.
당연히 대처리즘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내에서도 소수파로서 연립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대처에게 위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취임다음해 3월의 예산심의가 첫 고비가 됐다. 노동당은 물론 보수당 내부에서도 대처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보수당내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인 에드워드 히스 전 총리는 『긴축정책을 바꿔 경기부양책을 쓰지않으면 비참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대처는 굽히지 않았다. 결국 반대파 의원들조차도 『대처처럼 신념에 찬 「남자」를 본 적이 없다』며 대처의 긴축예산안을 승인해줄 수밖에 없었다.
81년 여름에는 30여개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길거리에서는 연일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계속됐다. 군중의 약탈과 방화가 잇따랐다. 신문은 연일 대처의 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사와 칼럼을 실었다. 그러나 대처는 요지부동이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는 긴축재정이 불가피하다. 재정지출 증가는 가계와 기업의 세부담과 금리만 올릴뿐』이라는게 대처의 변함없는 대답이었다. 그해 실시된 한 여론조사결과 대처의 인기도는 25%였다. 영국역사상 최저 기록이었다. 하지만 대처는 『인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시행할 용기가 있다면 대중은 당신을 존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 「다우닝가 시절」에서 『영국을 수렁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시기는 그때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고통의 시기가 3년이 지난뒤 영국경제는 소생의 빛을 보기 시작했다.한때 20%까지 치솟았던 물가상승률이 82년 처음으로 한자릿수인 8.6%로 떨어졌다. 경제성장률도 80년 2.2%에서 82년 1.7%로 돌아섰다. 영국은 이때부터 약 5년에 걸쳐 황금기를 맞게 된다. 대처집권이후 폐허가 된 광산촌과 공장터에는 하나둘 외국기업들이 진출했고 일자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국병이라는 말이 잊혀지기 시작한 때였다. 동시에 「영국의 기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대처가 11년 반이라는 기간에 줄기차게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일수 있었던 것은 집권초반 3년간 보여준 강인한 신념의 결과였다.
90년 11월24일 자진사임한 대처총리의 관저앞에는 꽃다발이 수북이 쌓였다. 집권말기 다시 흔들리는 경제지표에도 불구하고 집권초 대처가 보여줬던 용기와 신념에 대한 영국인들의 존경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김준형 기자>김준형>
◎주요 개혁정책/공무원 감축 경비제한·개인소득세 대폭 인하·노동조합 권한 축소·금융자율화 빅뱅단행·공기업 대폭 민영화
대처는 집권과 동시에 30여년간 영국을 병들게 만든 경제구조를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이때 추진된 정책들은 노동당이 집권한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돼 영국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대처가 임기중 추진한 주요개혁정책들을 요약한다.
▲정부개혁:영국병의 출발은 정부의 비효율성에 있다고 판단, 공무원감축 및 정부기구 개편을 통해 행정서비스의 질적개선에 나섰다. 각 부처별로 인력규모 축소 목표치를 설정·운용하고 총 운영경비에 제한을 가하는 조치를 취했다.
▲소득세 인하:기업과 근로자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법인 및 개인소득세를 크게 내렸다. 대신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율은 오히려 인상했다. 영국의 법인세율은 82년 52%에서 85년 이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35%로 내려갔다. 소득세기본세율도 33%에서 25%이하로 낮아졌다.
▲경쟁법:가격통제역할을 수행해온 물가위원회를 80년 4월 폐지하고 동시에 「독점·합병위원회」의 불공정행위 제한 권한을 강화했다.
▲고용법:80년이후 4차례에 걸친 개정을 통해 노조의 비대한 권한을 제한해나갔다. 클로즈드숍(Closed Shop:회사 노동자는 의무적으로 노조원이 되는 노조형태)제도를 무력화했으며 노동조합의 면책권을 약화시켰다. 상대적으로 고용주명령권은 대폭 강화했다.
▲금융개혁 및 자율화:79년 외환관리규제를 철폐, 업종 형태 출자비율에 대한 외국인 투자규모를 폐지했다. 86년 10월에는 이른바 「빅뱅」이라 불리는 금융시장 자율화조치를 실시했다. 증권거래에 대한 고정수수료제가 폐지됐고 금융기관간 벽이 없어짐으로써 영국금융기관은 무한경쟁시대로 돌입했다.
▲공기업민영화:집권당시 80여개에 달하던 대형 공기업들은 전형적인 고비용·고가격·저효율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처는 79년 영국석유(BP)를 시작으로 집권기간동안 20여개의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주택법:공영주택에 세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시가의 절반에 공영주택을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대처집권 4년만에 50만가구의 공영주택이 서민들에게 매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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