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속의 2월에 역사속의 3김을 생각해본다. 7세기의 양김, 즉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19세기의 김옥균. 김유신은 전쟁기념사업회가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고 22일은 김옥균의 기일이었다. 「7세기 양김」에 대한 후세 평가는 인색하다. 그들이 성취한 3국통일이 외세의 힘을 빌려 이룩한 것인데다 기존영역의 축소라는 이유 때문이다. 사실 김유신은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보기 힘들다. 황산벌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 계백의 결사대에 여러차례 저지됐고 백제 부흥군과의 전투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중국 역사상 최우량군주로 꼽히는 당태종의 야심을 좌절시킨 동시대 고구려 연개소문에 비하면 그의 군사적 재능은 분명 한수 아래다. 김춘추의 외교는 한마디로 「저자세 외교」. 주변국의 역학관계를 정확히 읽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고려조 서희의 당당함도, 조선조 광해군의 능란함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확실히 「7세기 양김」의 재능과 이력은 후세인들의 열광적 기림을 받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그러나 이 두 콤비의 시너지효과가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들이 성취못한 대업을 이룩하는 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양김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의 야심을 좌절시켜 통일을 항구화했다는 것. 이 점에서 이들의 외세 「이용」은 성공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19세기 김옥균의 좌절은 7세기 양김의 성취를 「절반의 실패」가 아닌 「절반의 성공」으로 여기게 만든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에서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내부모순 극복을 위해 부족한 힘을 보태려 한 것이다. 의도는 7세기의 양김과 똑 같았으나 그는 실패했다. 물론 그는 일본에 「농락」당하지 않았다. 일본이 그를 유배시켰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죽음의 상하이(상해)행」은 일본을 더 이상 호의적 외세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김옥균이 주체적 입장에서 외세를 활용하려 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IMF시대의 화두는 외세다. 어떤 이는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던 고질병을 고칠 수 있는 「쓴약」으로, 또 어떤 이는 「트로이 목마」로 여긴다. 7세기 신라에 있어 「당나라」는 분명 쓴 약. 그러나 19세기 조선에 있어 「일본」은 「트로이 목마」가 되었다. 냉전 시절 약소국에 외세는 두 모습을 보였다. 한국전쟁때 유엔을 전면에 세운 미국은 우리에게 순기능을 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똑같은 외세는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지며」 최악의 역기능을 했다. 야누스의 외세가 21세기 우리에게 어떤 것이 될지는 삐걱거리며 닻을 올린 DJP, 「20세기 양김」에 달려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