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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루스벨트:하(국난극복과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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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루스벨트:하(국난극복과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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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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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지금 당장 행동을 요구합니다”/“실업과 전쟁” 사령관 자처 취임즉시 실행 옮겨/공공건설·예술진흥사업 통해 수백만 고용창출/대공황속 노동자 권익보호·사회보장법 ‘위업’ 『도로마다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도로변 도랑둑에도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들은 졸지에 기계의 힘에 의해 쫓겨나 국도위에서 떼를 지었다. 국도변의 캠프, 굶주림에 대한 공포, 저녁을 굶은 아이들이 그들을 변화시켰다. 마치 침입자들을 쫓아내려는 듯이 마을사람들은 곡괭이로, 사무원과 점원들은 권총으로 무장을 하고 나섰다』 작가 존스타인벡은 1939년 「분노의 포도」에서 중산층이 실업자로 떠도는 참담한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규모 실업은 루스벨트 정부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였다. 불황의 정점기인 1932,33년에는 노동인구의 25%가 직장을 잃었다. 일부 학자들은 실제 실업률을 40∼50%까지 추산했다. 유랑민들이 거리에 들끓고 살인 절도 방화 등 각종 사회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1932년 여름에는 약 2만5,000명의 재향군인 실업자들이 워싱턴에서 「보너스 원정대」를 조직, 정부가 45년에 지급키로 약속했던 보너스를 미리 달라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굶주림에 지친 그들은 일자리를 얻을 가망이 없자 목숨을 잇기위해 당장 그 보너스를 요구했다. 무일푼의 이들은 펜실베이니아 길가에 늘어선 빈건물에 들어가 자리를 펴기도 하고, 애나코티아 강변에 종이판잣집이나 텐트를 친채 농성을 계속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직후 선언했다. 『우리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국민들을 일하는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입니다. 이 국가는 행동을, 지금 당장 행동을 요구합니다』 실업과 싸우기 위한 즉각적인 행동개시 선언이었다. 루스벨트는 실업축출의 전선을 지휘하는 사령관이었다.

 전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실업자 해소를 위해 기업인에게 생산 감축과 해고를 자제해달라고, 노동자들에게는 더높은 임금과 더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고통분담」을 호소했었다. 반면 루스벨트는 일자리를 만들었다. 국가가 시장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미국의 신앙과도 같은 자유방임주의를 버리고 정부가 빈곤과 실업문제를 전적으로 떠맡았다. 미국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정책의 혁명인 셈이다.

 한마디로 뉴딜은 고용창출 정책이다. 초기 뉴딜정책(1933,34년)은 긴급적, 구호적 성격이 강했다. 국민소득을 증대시켜 구매력을 촉진함으로써 경제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1933년 발족된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VA)는 테네시강 유역 7개주 64만평방마일의 불모지를 개발, 댐을 건설하고 전력과 비료를 생산하거나 지역 재조림, 국민휴양지 조성 사업 등을 추진했다. 이곳은 주기적으로 강이 범람하고 농장의 97%가 전기가 없었고 말라리아와 결핵이 만연한 지역이었다. 수백만가구가 옥수수와 소금절인 돼지고기로만 연명했다. TVA는 무엇보다도 부근 거주민에게 값싼 전력을 공급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데 성공했다. 주민들은 어느정도 돈을 호주머니에 넣게돼 이를 소비함으로써 수요가 공급을 못따르던 경제적 악순환이 차츰 회복됐다. 정부는 소비 증가와 함께 늘어나는 세금으로 더많은 공사를 촉진하면서 경제활동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전국산업부흥법(NIRA)에 의해 설치된 공공사업청(PWA)도 방대한 수의 실업자(연간 약 400만명)를 고용했다. PWA는 도로 공공건물 공원 학교 등과 같은 공공건물을 건설함으로써 고용을 늘리는데 주목적을 두었다. 텍사스의 브라운스빌 항구, 플로리다의 낮은 섬들과 육지를 잇는 도로와 교량들, 지방 상수도망 등 숱한 건설공사를 집행됐다.

 PWA는 건설사업외에도 예술진흥사업을 벌여서 수천명의 음악인, 작가 및 미술가 등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루스벨트는 『결국 그들도 역시 먹어야 한다』며 「고용의 사각지대」를 없애는데 관심을 가졌다. 화가들은 우체국 학교 연방건물벽에 벽화를 그렸고 문필가는 영토보존과 관계된 논픽션을 집필했다. 배우와 가수, 음악가들은 생생한 실황을 본적이 없는 국민들에게 공연을 통해 용기를 북돋고 음악회를 열어주었다. 수백만 페이지의 책자를 점자화했고 전통 무용과 인디언노래를 수백가지 기록했으며 노예들의 경험을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 2,000명이상의 노예들과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민간자원보존단(CCC)은 17∼28세 젊은이들을 나무베기, 화재진압, 감시소 건립, 캠프장 확장일에 투입했고 근로자들은 국가부흥청(NRA)을 통해 최저임금과 최대노동시간, 단체협약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초기의 뉴딜은 항구적인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했고 실업률은 여전히 20%를 넘나들었다. 노동자 농민의 폭동도 거세져만 갔다. 공화당의 맹공을 받은 루스벨트는 대중의 편에 서는 2차뉴딜(1934∼36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파업권이 보장됐다. 노동자의 권익과 지위가 향상된 것은 역설적으로 경제가 윤택했던 시절이 아니라 가장 어려웠던 바로 이때였다. 국민 대부분이 중산층이고 이들 대부분이 노동자란 점을 감안하면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시키는 정책은 곧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정책을 의미했다.

 노동자의 권리장전 또는 와그너법이라고 알려진 전국노동관계법(1934년 6월)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고용주와 교섭할 권리를 보장했으며 고용주는 노조활동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다섯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조직해 노동자들의 교섭을 후원하고 고용주들이 불법해고 등 부당처우를 했을 경우 이를 조사토록 했다. 기업의 노조탄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했고 정부가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 노사 쌍방이 대등한 위치에서 단체교섭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법의 목적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실의에 빠진 노동자들에게 용기를 줘 구매력을 증대시키고 더많은 유효수요를 창출해 경제회복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전국노동관계법의 주창자인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는 대공황의 원인을 1920년대 노동세력의 빈약과 이로인해 노사간 단체교섭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구매력 향상을 위해 단체교섭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이 기간에 복지사회로의 이정표라 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확립했다. 1935년 제정된 사회보장법은 실업보험금과 노약자 연금지급 등을 위해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협조키로 한 것이다.

 『오늘 몇년동안의 희망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평균적인 시민을 보호하고, 그의 가족이 실업에 대항하고, 가난한 노인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왔습니다』 루스벨트는 사회보장법에 서명하면서 감격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또다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뉴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루스벨트 노동정책에 대한 다양하고, 때로는 상반된 해석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저임금제 및 최대노동시간제 도입 등은 노동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추었을뿐 고용확대와는 거리가 멀어 실업자 해소가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당시에는 적합하지 않은 정책이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뉴딜정책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는 또다시 실업자가 1,00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정부가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시하고 실업자구제대책을 구체적으로 세움으로써 국민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는 실제적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는게 뉴딜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이다.

 허드슨강변 언덕에 위치한 루스벨트 도서관에 들어서면 첫 전시실은 대공황실이다. 한 실업자가 일자리를 달라는 피켓을 들고 서있으며 그 옆으로는 대공황과 관련된 각종 사진자료들이 가득 차있다. 이같이 루스벨트는 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탈출시킨 대통령으로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남대희 기자>

◎국민통합정치 일화/재향군인 시위에 진압대신 부인보내 그들과 함께 노래/군 예산 삭감계획 불만 맥아더 참모총장 사의에 “여기 당신목과 예산안 둘다 가져가게”

 루스벨트는 국민통합의 정치를 펴나가면서 여러 일화를 남겼다. 그는 때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때론 유머와 위트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결단이 필요할 때는 과감한 의지로 정책과 소신을 밀고 나갔다.

■1932년 여름 「보너스 원정대」가 시위를 벌이자 후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 시위대를 탱크와 최루탄으로 진압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 취임후 영부인 엘리노 여사에게, 『그들에게 가서 함께 이야기하고 커피를 마셔라』고 일렀다. 영부인은 이들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다. 참석자 한사람은 후일 이렇게 말했다. 『후버는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그의 부인을 보내주었다』

■루스벨트는 1933년 3월8일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대상으로 최초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12년 재임기간에 무려 998번의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들은 이전 대통령이었던 후버, 쿨리지, 하딩이 미리 요구했던 질문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어서 무척 기뻐했다. 그는 즉석에서 기자를 만나고 싶어했고 즉석에서 질문에 답하기를 좋아했다. 첫 기자회견후 기자들은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취임직후 군예산 삭감계획에 불만을 품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이 백악관을 방문, 『만일 다음 전쟁에서 미국 병사들이 적의 군화에 짓밟힌다면 그들은 루스벨트를 원망할 것』이라고 대들었다. 루스벨트가 호통치자 맥아더는 총장직 사의를 표명하고 뒤돌아 나왔다. 순간 루스벨트의 차분한 목소리. 『더글러스, 어리석은 짓 말게. 여기 당신의 목과 예산안을 함께 가져 가게』

■루스벨트의 뉴딜은 미국의 전통정책을 근본부터 뒤집는 정책이어서 당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35년 긴급구조프로그램을 위해 대기업의 세금을 올리는 과세법안을 통과시키자 반대신문들은 뉴딜을 로딜(Raw Deal·부당한 정책)이라 불렀다. 그가 구조사업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자 193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앨프리드 랜던은 그의 이니셜 FDR를 따 「프랭클린 데퍼시트(Deficit:적자) 루스벨트」라 불렀다.

■『내 이웃집에서 불이 났다고 칩시다. 그 집 주인이 우리집에서 쓰는 정원용 수도호스를 빌려달라면 나는 그집 불을 끄는데 협조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난 호스값 15달러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쓰고난 호스를 돌려달라고 할 뿐입니다』 1940년 12월7일 독일의 영국 폭격이 계속될때 루스벨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웃집 불」얘기로 무기대여법 통과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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