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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루스벨트(국난극복과 리더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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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루스벨트(국난극복과 리더십:상)

입력
1998.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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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려워 할것은 두려움 그 자체”/대공황 3년만에 5,000개 은행 문닫아/통장 900만개 휴지조각 실업자 3,400만명/33년 취임 구제·회복·개혁 ‘3R’ 주창 지금 우리나라는 6·25이후 최대의 국난을 겪고 있다. 역사는 난세에 영웅을 낳는다고 가르쳐왔다. 과거 심각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나라에는 항상 과감한 경제개혁과 리더십이 있었다. 경제개혁이 위기극복의 수단이라면 리더십은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추진력이다. 미국의 대공황을 이겨낸 루스벨트,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의 위기극복 과정은 새 정부출범을 맞는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4회 시리즈로 엮는다.<편집자주>

 1929년 10월24일 목요일 하오 5시께….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고층 건물 옥상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또 한 명의 「투신」을 지켜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주가 폭락으로 무일푼이 된 주식투자자 가운데 벌써 11명이 이날 하루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해 10월1일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 주식값은 870억달러. 거품이 붕괴되면서 11월1일 550억달러로 곤두박질쳤고, 1933년 3월에는 190억달러가 됐다. 무려 700억달러가 증권 게시판에서 녹아 없어진 것이다. 「검은 목요일」에 시작된 세기의 대공황은 그 후로도 10년동안이나 미국을 아주 처참하게 짓밟았다.

 땅과 집을 잡히고 은행돈을 꾸어 주식투자하고 그 주식을 담보로 또 주식을 산 투자자들은 전재산을 날렸고, 은행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부도를 냈다. 예금주들은 문닫은 은행에 몰려가 돈을 내놓으라며 아우성쳤다. 3년동안 5,000개 은행이 문을 닫았고 저금통장 900만개가 휴지조각이 됐다.

 수많은 기업이 파산했고 빈민도 기하급수로 늘어갔다. 실업자수는 1930년 400만명, 1931년 600만명, 1932년 1,200만명, 1933년 1,500만명으로 불어났다. 비공식적으로는 실업자수가 무려 3,400만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센트 식당」에는 끝없는 줄이 늘어섰고, 사람들은 묽은 죽과 맹물같은 커피라도 먼저 타기 위해 싸움을 해댔다. 시카고의 한 음식점 앞에서는 수십명의 거지들이 음식 찌꺼기 한 통을 갖고 싸웠고 훈장을 받은 제대군인들도 길거리에서 사과한개에 5센트를 받고 팔았다. 수백만명이 월세와 저당금을 갚지 못해 집을 잃은 채 빈터에 천막을 치거나 버려진 자동차안에서 생활했다. 공황이 절정에 달한 1932년 뉴욕에서만 95명이 굶어 죽었다.

 농부들은 파는 것이 더 손해인 곡식을 마구 불태웠고 수많은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이동했다. 거리마다 히치하이커들이 손가락을 펴들고 도시행 무임승차를 위해 줄지어 서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항거도 거셌다. 네브래스카 아이오와 미네소타 등에서는 농민들이 낮은 농산물 가격에 항의,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트럭들을 정차시킨 채 우유와 채소를 내던지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직장을 잃고 헤매는 노동자들은 시위를 계속했다. 시카고에서는 교사들이 봉급삭감에 항의해 세계 박람회 깃발을 찢으며 시청으로 돌진했다.

 호황을 누렸던 1922∼25년 평균지수를 100으로 잡을 때 1933년 미국 공업생산은 60, 건축은 14, 고용은 61, 노동자임금은 38을 기록했다. 국민총생산(GNP)은 1928년 850억달러, 1930년 680억달러, 1932년에는 370억달러로 곤두박질쳤다.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원조를 하는 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차원의 책임문제로 정부에 의해 펼쳐져야 합니다. 경제피라미드의 바닥에 깔려있는 「잊혀진 사람」들에게 다시한번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구제책을 찾아야 합니다』

 경제난이 극에 달한 1932년, 더이상 나빠질 수 없는 참혹한 생활에 찌든 국민들은 제3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후보의 말에 귀기울이고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연방정부차원의 구제를 거부하며 『위기가 곧 극복될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당시 허버트 클라크 후버 대통령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겠다고 확신에 차있는 루스벨트를 국민들은 지지했다. 그는 선거인단 투표 472대 59라는 사상 유례없는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들은 루스벨트가 무엇을 약속했느냐보다는 그의 얼굴과 연설에서 풍기는 자신감에 기대를 걸고 표를 던졌다.

 『지금은 똑바로 진실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모든 진실을 솔직하고 거짓없이 이야기할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처지로 인해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위대한 나라는 과거에 해냈던 것처럼 다시 또 해낼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 1933년 3월4일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토요일 하오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루스벨트는 자신감에 넘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공황을 전쟁하듯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말해 국민에게 확신과 기대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악몽의 순간에 전혀 새로운 정책(뉴딜·New Deal)으로 대공황을 이겨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숨돌릴 틈 없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백악관 집무 첫날에 4일간의 전국적 은행휴무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취임 후 5일째 되는 날 긴급은행구조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튼튼한 은행만 다시 개점하도록 허락했다.

 집무 첫주에 루스벨트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6,000만명의 청취자를 대상으로 한 라디오 방송 「노변정담(화롯가에서의 대화)」.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은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여러분의 돈을 다시 은행에 보관하는 것이 집안에 두는 것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루스벨트는 은행 운영실태에 관해 국민들에게 이야기하고 다시 저축을 하도록 권유했다. 다음날 아침, 국민들은 은행으로부터 돈을 인출하는 대신 다시 돈을 맡기기 위해 줄을 섰다. 1주일안에 은행의 4분의 3이 다시 업무를 개시했다. 격려편지와 전보가 백악관에 쏟아져들어왔다.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줌으로써 불안감은 낙관과 희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을 추진하면서 라디오를 통해 수시로 자신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동의를 구했다. 청취자들은 루스벨트가 마치 사랑방이나 거실에 들어와 앉아서 자신과 얘기하는 것 같은 감동을 받곤 했다.

 그는 또 국회에 특별긴급회기 개회요구서를 냈다. 3월에서 6월에 이르는 100일동안 국회는 많은 법률안들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루스벨트는 3R, 즉 구제(Relief), 회복(Recovery), 개혁(Reform)을 과제로 뉴딜정책을 주창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와 정부 불개입 원칙을 철통같이 지켜온 역대 정권과 달리 고용을 창출해 구매력을 증진(수요촉진)시키고 경제에 활력을 주는 적극적인 정책을 폈다. 뉴딜은 정책의 대전환, 곧 혁명이었다.

 테네시강 개발사업, 국가부흥청 설립, 농업조정법 제정, 연방예금보험공사 설립 등 100일 입법을 통한 새 정부의 의욕적인 정책추진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긴급구조프로그램 결과로 국가채무(1936년까지 3억6,000만달러)를 증가시켰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데 농산물 가격인상을 위해 생산량을 고의로 줄였다며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가 입법한 각종 뉴딜법안은 훗날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잇따라 받으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가장 큰 공헌은 새로운 법의 제정보다는 공황상태에 빠진 국민들에게 심리적인 접근책을 쓴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되찾아 심어주고 희망이 사라진 곳에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재주였다. 뉴욕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후천적으로 다리를 절게 된 그는 육체적인 고통과 투쟁하면서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는 미국사상 초유의 4선 대통령이 됐다.

 1936년 다소 회복되는 듯하던 경기는 1937년 중반부터 다시 불경기로 돌아섰으며 1938년에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실업자가 1,000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 실업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시산업에 흡수됐다. 결국 미국 대공황을 이긴 직접적인 요소는 전쟁이 됐지만 1940년대 이후의 대호황은 뉴딜정책이 차지할 몫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남대희 기자>

◎취임 100일 주요입법 내용/테네시계곡 개발 자원보존단 창설 수천만 고용창출/농업조정법 신설 생산량 축소통해 농산물값 끌어올려

 루스벨트는 1933년 3월 대통령 취임직후 소집된 100일 동안의 의회 특별회기중 뉴딜정책의 핵심이 된, 일종의 국난극복을 위한 비상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법안 중 일부는 1∼2년후 대법원으로부터 위헌판결을 받기도 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농업조정법(AAA):농부들이 생산량을 자발적으로 줄이도록 해 농산물 가격을 끌어올리는 법. 1935년까지 3,000만에이커 이상에서 생산이 중단됐고, 농산물가격은 50%까지 치솟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을 때 정부가 농산물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줄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1936년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았다.

■국가산업부흥법(NIRA):국가부흥청(NRA)을 설립, 750개 기업규칙을 실행했다. 이 정책에 참여하는 기업의 상품에는 NRA의 상징인 「푸른 독수리」 마크를 붙여주고 이 마크가 없는 상품은 불매하도록 했다. 공정경쟁을 촉진시키려 했으나 대기업이 다시 독점욕을 발동, NRA규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1935년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받았다.

■테네시계곡 개발공사(TVA):독립된 공사인 TVA에 테네시강 유역 7개주의 개발권을 부여했다. 댐과 발전소를 건설하고 삼림보호, 토양개선, 값싼 전기공급 등의 사업을 하도록 했다. 부근 거주민들이 많은 일자리를 얻었다.

■민간자원보존단(CCC)창설:18∼25세의 빈민 청년들을 고용해 나무베기, 화재진압, 도로건설, 홍수통제 등 자원보존 업무에 투입했다. 1933∼42년에 2,500만명의 젊은이가 일을 했다.

■연방긴급구호법(FERA):주정부와 시정부 등에 빈민 구제사업을 위한 자금으로 5억달러를 직접 지원했다.

■금주법 폐지:그동안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함으로써 밀수와 밀주제조 및 유통을 둘러싼 조직범죄를 양산했다고 판단, 금주법을 폐지했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은행의 파산시 일반 저축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했다.

■주택소유자 자금 대부회사(HOLC):저당물 반환권 상실 예방 등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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