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때 첫 인연… 작년 대선때 ‘공조의 극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와 김종필 국무총리지명자는 제각각 40여년의 정치역정을 달려왔지만 「밀월관계」를 유지한 기간은 최근 2년의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두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연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첫 대면은 6대(63년) 국회때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첫 인연은 5·16으로 맺어졌다고 해야 한다. 김당선자는 5·16으로 인해 어렵게 얻은 국회의원직을 불과 며칠만에 내놔야 했기 때문에 JP의 피해자였던 셈이다. 두 사람은 김당선자가 7대(71년) 대선에 출마하고, JP가 70년대초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서로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JP는 총리를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은 80년 서울의 봄 당시 함께 탄압을 받는다. 80년 5·17조치로 김당선자는 국가보안법 위반등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82년 12월 미국으로 출국 조치됐다. 신군부에 의해 재산을 압수당했던 김총리지명자도 미국으로 쫓겨갔다. 두사람은 80년대 후반 4당체제하에서 더욱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야권의 3김은 87년 대선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각각 출마, 고배를 마셨다.
JP는 90년 1월 3당합당이후 92년 대선에서 YS의 손을 들어주었고 김당선자는 대권3수에 실패했다.
95년 2월 JP는 민자당을 탈당해 YS와 결별한 뒤, 6·27지방선거에서 DJ와 공조체제를 유지했다.
김당선자의 정계복귀와 국민회의 창당과정을 둘러싸고 색깔론과 보수논쟁이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한때 틀어지기도 했다. 96년 4·11총선 과정에서 DJ와 JP진영은 상호비방을 자제하는등 총선이후 여권의 견제를 위한 야권공조에 적극 나섰다. 97년 대선과정에서 두사람은 공조의 극치를 이루었다. 곡절 끝에 야권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 대선 승리를 낚아냈던 것이다.<김성호 기자>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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