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경제 세계의 거울 못돼도 개도국엔 성장모델 입증/IMF 체제 거스를 수 없지만 구체적인 한국의 전략 필요” IMF체제를 두달 이상 거치는 동안 앞으로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의 윤곽이 잡히는 것 같다. IMF는 「동아시아모델」로 알려진 경제의 틀을 바꾸도록 요구해 왔고, 한국 정부도 그에 맞추어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60년대 한국이 기본적으로 일본을 모방해서 만든 「개발국가」의 유산을 완전히 정리하고 미국 주도하의 새로운 세계질서하에서 국제적 기준에 맞춘 경제제도와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재벌체제로 표현되는 개발국가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옳은 방향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IMF 체제가 궁극적으로 한국경제에 유리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도매금으로 결론을 내기 전에 이문제는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 경제가 세계적으로 위력을 떨치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모델은 미국등 선진국에서도 모방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후반 사정이 달라지자 경제전문가들의 견해가 일변하여 선진국뿐 아니라 개도국의 모델로서도 등한시되고 있다.
현시점에서 일본경제가 세계의 모델이 될 수 없고, 한국에게도 궁극적으로 모방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일본모델이 실패한 것은 어디까지나 선진국이 되고 난 후 세계를 선도하는 데서이다. 개도국으로서 선진국을 따라잡는 데는 일본모델이 지금까지 어떤 모델보다 더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현재 한국이 일본과 같은 발전단계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당장 공식환율로 보아 일본이 일인당국민소득 3만달러를 오르내리는 최선진국인데 반해 한국은 6,000달러선의 개도국이다. 우리는 아직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이 지상과제인 개도국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개혁은 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하지 못한 개혁을 IMF의 손을 빌려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일리가 있고 역사적 선례도 있다. 2차대전 이후 일본과 독일 등이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의 이익집단에 얽매이지 않은 연합국측의 점령정책으로 나라가 새로이 태어났던데 힘입은 바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는데도 조건이 있었다. 2차대전 직후 미국의 의도는 일본이나 독일에게 제대로 된 공업생산력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냉전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정책이 전면적으로 바뀐 것이다. 냉전하에서도 미국이 일본을 자신과 대등한 공업국으로 키울 생각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일본이 현재와 같은 위치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세계체제 운영전략을 철저하게 이용한 결과이다. 이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성격이 강한 것이다.
냉전이 끝난 90년대에 이런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 미국이 선도하는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IMF가 처음부터 통상적인 관할영역을 넘어 경제발전모델을 바꾸라고 요구한 것이 「음모」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IMF체제하에서의 개혁이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IMF와 국제자본이동에 이미 「덜미」를 잡힌 상황에서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회복이 자국의 경제성장과 세계경제에도 중요한 만큼 미국과 IMF도 한국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서 IMF체제가 아니더라도 한국이 세계체제로부터의 이탈을 각오하지 않는한 과거와 같은 발전모델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감안하더라도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구체적 실천에서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최근 정부조직 개편에서 통상기능을 외무부로 이관한 것은 이런 인식이 결여된 소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되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통상 및 산업 전문가의 외무부 전보 등 철저한 보완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경제정책 담당자도 「세계화」뿐아니라 산업의 현실에 대한 감각이 있는 분이어야 할 것이다.
한국같은 나라가 세계경제질서를 거슬러서 살아갈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달려 있다. 위기와 대전환의 시기에 좀더 사려 깊은 대처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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