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 불구하고 ‘봉사하는 학자’ 전통/한국발전 원동력/박동선 스캔들 수습/주미대사 부임시절 밤샘토론 아직 생생/81년 연대 복직 잠시 부름받아 테러순직/우리부부 많은 눈물한국이라는 나라는 마치 한가족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한국민도 서로 심하게 다투거나 반목을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이방인일 경우 한국민은 똘똘 뭉치곤 한다.
대부분의 나라들도 이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성향이 더욱 뿌리깊게 박혀 있다고 여겨진다. 외부의 도전에 시달려왔고, 외세에 점령당한 적이 있는 역사적 경험 때문일까. 아무튼 한국민의 이같은 독특한 「단결」정신은 가족주의적 행동양식과도 관련이 깊다.
한국민은 더 큰 단위의 가족, 즉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 불화나 심지어 혐오감까지 접어두는 민족이다. 다시 말해 단결된 힘과 봉사정신이 국가의 최우선 목표성취와 대의명분을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사사로운 감정은 자제한다.
무려 45년이 넘도록 한국민과 긴밀히 교류해 온 나는 미국식 교육이 이 나라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 근대사를 이끌었던 주요 지도급 인사중에는 미국에서 선진교육을 받은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들은 가족의 보호에서 벗어난 형제들처럼 저마다 독자적인 목표를 선언하는 한편 독립에 따르는 숱한 도전과 유혹을 피해 나갈 준비를 한다. 이런 일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흔히 벌어지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나의 친구인 함병춘 박사는 이런 패턴을 매우 실감있게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처음에는 통일원(NUB) 고문으로, 이후 70년에서 73년까지는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이어 곧바로 주미 대사로 발탁돼 73년 12월부터 77년 5월까지 워싱턴에서 활약했다.
그는 박정권에서 봉사하기 위해 연세대의 교직에서 거의 끌려나오다시피 했다. 그는 인정받는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특히 한국의 정치문화를 해석하는 능력과 서구의 도전에 대한 통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노스 웨스턴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예일대 법대에서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연구활동을 했다.
교수가 관계에 진출하려 한다는 이유로 간혹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함교수와 나는 동료 학자로서 곧바로 친구가 됐다. 우리는 70년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통일원 주최의 「국가 통일」에 관한 학술회의에도 나란히 참석했다. 당시 우리 모두는 사람들이 상이한 문화에 어떻게 적응하는지에 공통된 관심을 가졌다.
나는 74년 1월 그가 주미 한국대사로 부임하자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동선 스캔들로 한미간 긴장이 고조되자 한국의 대의명분을 지키기 위해 관록이 풍부한 그에게 대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실제로 그는 미국의 독특한 정치 절차와 체제를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는 덕망있는 학자였기 때문에 주미 대사로는 적임자였다. 당시에는 박동선 사건으로 미국에서 행해진 한국 중앙정보부(KCIA)의 불법활동과 의원을 포함한 몇몇 미국인들의 행동이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일부 미국 의원들은 뇌물 수수에도 연루돼 있었다.
함대사는 사실상 직접 대변인으로 나서 몇몇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그도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에는 벅찼던 게 사실이었다.
충실한 공복이었던 함대사는 본국에서 전달된 훈령이나 지시를 받아들여 주어진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믿을만한 몇몇 친구들에게는 본국 정부와 이견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직언을 할 필요가 있다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함대사와 우리 가족간의 긴밀한 관계는 73년 초가을부터 우리 부부가 서울에 살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우리는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은 또다른 한국인 명사들을 포함한 많은 친구들과 조용하면서도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홍구 박사, 주미대사를 역임한 김경원 박사, 박정수 국민회의 의원과 부인 이범준 박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73년 가을 나는 「한국가족」에 대한 한국민의 충성심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처음 깨달았다. 이런 충성심 때문에 재능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조국을 위해 봉사키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누구도 박정권의 강경 조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국 친구들에게 불만을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다. 물론 서로간의 신뢰가 손상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는 경우에는 더러 속마음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별로 공감하지도 않는 권위주의적 정권에서 봉사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한국이 그처럼 놀랍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발전이란 경제개발뿐 아니라 외부세계에 대한 개방과 정치적 다양성을 포함한 근대화의 모든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 학문을 숭상하는 한국 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풍토 정착에 일조하기를 원했다. 둘째, 군부출신 지도자들의 강경한 태도는 얼마든지 누그러질 가능성이 있었다. 셋째, 유교관념상 정부에 봉사하는 학자의 역할은 한국적 전통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할 만큼 지대했다. 끝으로 일군의 뛰어난 소장 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와 엘리트 집단간의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함대사가 대표적 예에 해당됐다.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위협에 직면한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국민통합을 창출해내고, 대한민국을 국제 사회의 주류그룹에 합류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함병춘 대사가 워싱턴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그를 수시로 방문했다. 함대사의 부인 심효식 여사와 내 아내 세니도 이내 친해졌다. 우리 네 사람은 참으로 보람된 시간을 보냈다.
함대사 부부가 사우스 캐롤라이나대를 방문한 적도 있다. 함대사는 특히 우리 대학 국제문제연구소(IIS)가 주최한 「세계 정세에서의 분단국」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도 참석했다. 함대사 부부를 손님으로 맞는 일은 즐거웠다. 그들이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 있는 우리 집에서 머물렀던 75년 6월 어느 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였다. 함대사는 한미관계를 언제나 이지적이고 학문적인 관점에서 탐구하기를 좋아했다.
이 문제만이 대화의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 네 사람은 가족과 자녀 양육, 문화적 도전에 적응하는 방법 등을 놓고 장시간 진지하게 얘기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함대사의 두 아들은 출중한 경력을 쌓으면서 가족의 보살핌과 애정에 보답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함대사의 장남인 함재봉 연세대 교수가 93년 10월 몇몇 학자들과 함께 부친의 유고를 모아 책을 발간하자 매우 기뻐했다. 「한국의 법, 정치 그리고 문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영문 유고는 이미 86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발간했었다. 이 책은 근대 한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역저라고 생각한다. 둘째 아들 재학군도 부친의 위업을 따라 법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70년대 나와 교류하면서 하나의 그룹을 형성했던 동료 학자중 공직을 맡게 된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언제나 (공직보다는) 강의와 연구활동을 했으면 한다면서, 조용한 캠퍼스 생활이 그립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 내가 주한 미대사로 재임하던 80년대에는 캠퍼스가 그다지 조용하지도 않았다!
81년 여름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맞이했던 사람중 한 분은 함병춘 교수였다. 캠퍼스로 되돌아 가려고 안달이었던 그는 바로 그 무렵 연세대 강단에 복귀했다. 그는 나 역시 대사직을 끝낸 뒤에는 캠퍼스에서 학문과 벗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말은 옳았다.
그는 당시 중요한 한권의 책을 쓴 뒤 한창 편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인 82년 5월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 학술회의에서 「한미관계 회고와 전망」이라는 매우 사려깊은 연설을 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면서 (그가)대학으로 되돌아가 나 역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함교수는 한달도 지나지 않아 전두환 대통령이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자 다시 청와대에서 일하게 됐다. 물론 나는 함교수가 더이상 (공직에) 불려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함교수가 전대통령에게 한미간 현안과 관심사를 전달해주는 통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는 그의 청와대 근무를 은근히 반겼다.
그는 그러나 주요 사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나(미국대사) 또는 미국과 너무 친해 보이지 않기 위해 처신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딜레마에 대해 함께 진지하게 논의한 적도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나는 함교수의 또다른 훌륭한 성격도 알게 됐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났고 자신이 다루는 문제들에 함축돼 있는 아이러니를 파악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또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고 이해력의 폭도 넓디 넓었다. 한마디로 그는 급박한 현안을 즉각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그는 미소를 지을 때나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눈을 깜박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너털웃음을 터뜨리기보다는 절제된 웃음을 짓는 스타일이었다. 그가 미소를 지을 때면 우리는 가끔 무언의 대화를 주고 받았다.
함교수는 나의 스승중 한명이었다. 한국 문화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내가 한국 문화의 다양한 줄기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가 67년 펴낸 「한국의 정치적 전통과 법」을 읽었고, 수년동안 그와 이 책을 소재로 토론을 즐겼다. 그는 나같은 서구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한국 전통의 독특한 특징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국이 이같은 전통을 간직한 채 국제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서방의 전문가들은 간과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나는 함교수와 함께 평생 처음 한국의 무속신앙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연령과 남녀관계에 접근하는 방법도 알기 쉽게 가르쳐주었다. 함교수같은 가까운 한국 친구들 덕분에 나는 80년대 대사 부임준비와 업무수행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한국이 미국 외교정책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대한 함교수의 인식에는 깊은 통찰력과 장기적 안목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82년 1월7일자 코리아 헤럴드에 실린 기고문에서 그는 한미관계를 둘러싸고 한국이 직면한 문제점과 도전을 명쾌하게 진단했다. 그의 글을 요약한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는 한국을 대일 정책의 대수롭지 않은 부속물 정도로 여기는 추세가 만연돼 있다. 한국민은 이러한 성향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앞으로도 한국 외교관들이 직면할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한반도의 안정과 민주화를 이루려는 한국의 장기적인 목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명쾌했다. 즉 그는 안정과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하기 위해서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같은 기고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다시 말해 한국은 이제 경제적 영향력에 걸맞은 역동적인 자유 민주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한국은 지난 30년동안 발목이 잡혀있던 전쟁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또 다른 전쟁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해도 그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자유 민주주의는 시민정신의 함양과 지속적인 경제개발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치안정과 꾸준한 생활수준 향상은 국가안보와 정치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부부는 83년 10월9일 아웅산 폭탄테러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각 함교수 가족을 떠올렸다.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렸고, 나는 모든 사람이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슬픈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후 나는 심효식 여사는 물론 두 아들과 계속 접촉을 유지하면서 함교수에 대한 변함없는 존경을 표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해석하기 위해 그의 치밀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역작들을 뒤적이곤 한다. 함박사는 해양법 전문가였다. 그는 외무부 본부대사 시절인 77년 5월 유엔 해양법회의에 수석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지적인 열정이 넘쳤던 그는 국제정세를 매우 날카롭게 분석했다. 이런 능력은 일류급 전문가들도 감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또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의 태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는데, 이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였다.
나는 함박사 가족이 그의 도덕성에 고무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제자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귀감이 됐다. 그는 끈끈한 우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내가 한국과 한국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같은 방법이 국가대 국가간 관계에서도 그대로 연장될 수 있기를 늘 기대했다.
심효식 여사는 지금도 우아함을 유지하며 창조적 재능을 과시하고 있다. 훌륭한 화가인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과 사연이 담긴 소포를 내게 보내주고 있다. 나는 이중에서도 촛불이 서서히 공간에 빛을 발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을 각별히 좋아한다. 이 작품은 함교수와 그 가족이 근대 한국에 끼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이종수" 기자>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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