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느 TV에서 심야토론을 벌였는데 큰 주제가 「우리 사회의 양심 왜 무너지고 있나」였습니다. 이런 주제가 등장한 까닭은 최근에 탄로난 판사들과 변호사들의 돈거래와 서울대 치과대학에서 발생했다는 교수 임용에 있어서의 비리 같은 것 때문에 그런 토론의 주제가 마련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토론에 참가한 여섯 사람이 한결같이 희망하는 것이 부정 부패의 뿌리를 뽑는 일이었고,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와 팩스의 내용도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것이, 이틀 뒤면 출범할 김대중 정권에 대한 간절한 여망이기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국민은 역대 대통령들과 그 권력 주변 사람들의 부정 부패에 대하여 넌더리가 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축재자들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그 액수까지도 분명하게 공개가 되었는지, 만일에 회수가 되었다면 누가 그 돈을 간직하고 있는지, 쓰여졌다면 누가 무슨 일에 얼마나 썼는지, 반드시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믿는데 한번도 그 전말이 공개된 적은 없었습니다.
토론과정에서 부정 부패의 뿌리를 뽑기 위해 부패방지법의 강화나 부패방지위원회의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국민 전체의 의식개혁이 선행되지 않고는 부정 부패의 척결이 불가능하다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어쨌건 문제는 이 나라 각계각층에 만연된 고질적 부정 부패가 뿌리 뽑히지 않고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은 취임하자마자 개혁과 사정의 칼을 뽑아 들고 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모든 국민이 박수를 보낸 것도 사실인데 결국 용두사미격으로 끝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정권의 주변에는 정태수씨 장학로씨 김현철씨등 당대에 손꼽히는 부정 부패의 큰 손들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이 실패한 것만이 아닙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유아독존격으로 『다른 놈들은 다 썩었지만 나만은 깨끗하다』는 식의 오만과 불손, 위선과 허위로 일관했기 때문에 시작부터 그 개혁은 삐걱거린게 사실 아닙니까. 과거 돈에 깨끗한 정치인이 어디 있었습니까. 다 함께 한국정치라는 뜨물 속에서 놀다가 혼자 헤엄쳐 나와 『나만은 깨끗하다』고 주장하니, 누가 그 말을 믿으며 누가 그 개혁의 성공을 확신하겠습니까. 박수를 보낸 사람들은 사정을 몰라서 그랬을 뿐입니다.
만일 김영삼 대통령이 『나야말로 전형적인 구정치인입니다. 남의 돈으로 정치하였고, 남의 돈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오늘부터 부정과 부패는 일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깨끗한 정치를 위해 내 목숨을 걸겠습니다』라고 선언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달라졌을 것으로 내다보였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대로 된 것이 아닙니까.
15대 대통령은 과연 부정 부패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 전국민의 가장 큰 바람은 바로 그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자신은 15대 대통령 재임기간에 그 뿌리가 뽑히리라고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마는 당선자께서도 정치자금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깨끗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서 2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당선자 자신의 입으로도 이미 고백한 바 있습니다. 지역구 공천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전국구 후보들에게서는 받은게 사실 아닙니까. 물론 야당시절에 있었던 일이라 「뇌물성 대가성」은 없는 돈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돈이 결코 깨끗한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교동 자택을 증축하시던 때, 일산에 새 집을 마련하시던 때, 일정한 수입도 없으신데 어디서 그 돈이 생겼을까 저는 혼자 매우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말이 실례가 된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시대의 풍운아에서 이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곧 취임을 하시게 됩니다. 한평생 야당을 하다 이 풍토 속에서 청와대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셔서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는 깨끗한 정치, 부정과 부패가 전혀 없는 투명한 정치의 꿈을 이루어주소서.<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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