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장 ‘순간의 진실’을 잡아라/로버트 카파 종군기자로 큰 족적/36년 창간 미라이프지 수많은 사진작가 배출/유·무형 정치압력서 늘 자유롭지 못해 나치집권기의 신문에는 안경 쓴 히틀러의 모습이나 괴벨스의 안짱다리가 드러난 사진은 실리지 않았다. 기자들의 사진은 철저히 통제됐다. 비록 신문에실리지는 않았지만 사진기자들은 사실을 보았고 사진으로 진실을 남겼다. 보도사진은 다큐사진보다 더 많은 유·무형의 압력을 제도권으로부터 받아왔다.
「진실을 잡아라」. 언제나 진실의 현장에 있는 이들의 사진은 그 생생함 때문에 안방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도사진, 즉 포토저널리즘의 도약기는 1·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됐던 1920∼50년대. 콘테사 네텔의 육중한 건판사진기 대신 1923년 오스카 바르나트가 개발한 두루마리필름이 담긴 라이카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링컨대통령의 초상사진작가로 남북전쟁 현장을 7,000장의 사진에 담은 매튜 브래디(1823∼1896), 그의 도제 티모시 오설리반(1840∼1882)등의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암울하게 담아냈지만 눈깜짝할 새 벌어지는 순간의 진실을 잡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6년 스페인내란 중 총에 맞아 쓰러지는 군인의 전사순간을 잡은 로버트 카파(1913∼54)의 「공화군병사의 죽음」은 보도사진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설명한다. 되돌릴 수 없는 단 한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 바로 보도사진의 요체임을 말해준다. 『직장에 구애받지 않는 종군기자가 되고 싶다』던 자신의 말처럼 카파는 중일전쟁, 2차세계대전, 48년 이스라엘전쟁, 50년대 인도차이나전쟁 등 화염 속의 인간을 포착, 종군사진기자로 가장 큰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독자적인 자본없는 사진작가들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47년 카파는 동료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등과 의기투합, 파리에 「매그넘통신사」를 열고 이듬해에는 뉴욕으로 진출했다.
미국의 포토저널리즘잡지 「라이프」는 수많은 사진작가를 배출하면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1936년 11월19일 창간된 이 잡지는 마카렛 버크 화이트, 에이젠슈타트, 윌리엄 유진 스미스 등의 이름난 사진작가들이 지면을 장식했다. 그들은 극동과 유럽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사진으로 역사의 흐름을 기록했다. 탁월한 영상미학은 역시 라이프에도 큰 영광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온 세상을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반성의 소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자국 중심주의적 시각은 뉴욕에서 「포토리그」같은 대안매체를 탄생시켰다. 사진은 사실을 담는다. 하지만 그 사실이라는 것이 언제나 정치적 입장에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과는 다르다. 보도사진이 사실과 진실의 길항 한 가운데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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