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7% 성장책 거품키우고 외환 규제풀어 달러 퍼내기/능력도 안되는 OECD 가입 결국엔 빚더미에 ‘환란’ 「장밋빛 신경제계획에서 모라토리엄(대외지급유예)직전의 대환란」
문민경제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매년 7%이상 성장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걸고 출항했던 「신한국호」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처참한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93년에 5.8% 성장률, 4.8% 물가, 3억8,000만달러의 경상흑자를 기록했던 한국경제가 거듭된 실정에 불운까지 겹치면서 불과 5년만에 마이너스 성장과 두자릿수 물가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외채까지 짊어진 난파선 신세가 됐다. 경제에 대한 대통령의 무지와 무관심, 5년동안 경제부총리를 7명이나 갈아치운 인사의 난맥,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 능력에 걸맞지 않은 금융분야의 규제완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 바람에 30년간 일구어온 한강의 기적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국민들은 극심한 분노와 자괴감에 실업대란과 물가앙등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경제실정의 싹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직후 첫 작품으로 내세운 신경제계획이었다. 당시 박재윤 경제수석이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신경제계획은 93년 성장률을 6.0%로 끌어올린 뒤 94년부터는 매년 7% 이상의 고도성장을 계속한다는 일종의 경기부양책이었다. 신경제계획은 당시 저점을 막 통과하고 회복국면에 진입하려던 경기에 기름을 부어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심화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94년부터 반도체가 천문학적인 흑자를 내고 주식시장 등에 외화가 대거 유입되자 정부가 앞장서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등 축제분위기를 연출했다. 「달러퍼내기」를 해야 한다며 외국환 규제를 과감하게 푸는가하면 94년과 95년에는 경상수지가 적자임에도 불구, 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을 평가절상하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 금융개혁이나 재벌개혁같은 구조개혁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 바람에 출범 2차년도인 94년부터 경상수지 균형을 이룬 뒤 마지막 연도인 97년엔 37억달러의 흑자를 낸다는 목표를 잡았던 경상수지는 94년부터 적자로 돌아서면서 96년에는 사상 최대인 237억달러의 적자를 냈고 지난해에도 88억5,000만달러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
특히 97년 한해는 문민정부의 문제점이 한꺼번에 노출됐다. 반도체 붐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데다 1월의 한보부도를 계기로 차입경영 정경유착 과투자 오투자로 요약되는 한국경제의 허구가 국제사회에 공개됐다. 정부는 「경쟁력 10%높이기」와 금융개혁으로 대응했으나 한보사건 이후 최고통수권자의 리더십이 와해되는 바람에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최대의 치적으로 꼽았던 금융실명제마저 꼬리를 감추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도 환란의 한 요인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결국 세계11위의 허황된 꿈은 사라지고 경제는 10여년전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정희경 기자>정희경>
◎금융실명제/“경제정의 구현” 제도는 좋았지만 현실외면 끝내 종말
금융실명제는 YS집권 5년 내내 찬반양론이 끊이질 않았던 테마. 실명제를 둘러싼 「경제활동위축의 주범」과 「경제정의의 구세주」의 논쟁은 한국사회의 보혁 대결처럼 전개됐다.
93년 8월12일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시작된 금융실명제는 국가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금융거래는 반드시 자기 이름으로 해야한다는 아주 상식적 논리에서 출발했지만 검은 돈의 음성적 수수관행이 뿌리내려 있던 한국경제구조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YS정권에는 실명제가 정의구현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개혁업적이었다. 입법화도 보완도 거부했다. 실명거래가 싫을 수밖에 없었던 재벌과 정치권등 기득권세력의 반발은 갈수록 거세졌고 YS정권의 도덕성이 추락하면서 서민조차 실명제를 외면했다. 특히 김현철씨 차명계좌가 드러나면서 YS정부는 「대통령 아들조차 어기는 실명제」를 더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YS의 유일한 업적이라던 금융실명제는 결국 지난해말 종합과세유보 및 무기명채권허용으로 정권과 함께 폐지됐다. 경제정의와 형평조세의 꿈도 함께 사라졌다. 정의롭지 못한 정부는 정의를 만들어 놓고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이성철 기자>이성철>
◎통일·외교정책/주도권도 빼앗기고 신뢰도 잃고/‘민족중심’ 기치 거창한 출발/경험미숙 미·일과 잇단 마찰
문민정부의 통일·외교정책은 「민족중심」 「신외교」를 내세우며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정책의 일관성 결여와 혼선만을 야기시켰다는 비판적 평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문제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상실하고, 미국과 일본 등 전통 우방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했다는 지적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후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민족중심의 획기적인 대북정책과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이를 주도하는 「신외교」정책을 펼치겠다고 천명했다. 김대통령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북관계에 실무경험이 없는 학자출신의 통일·외교안보팀을 중심으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를 송환하는 등 「깜짝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이런 정책은 김대통령 취임후 불과 한달도 지나지 않아 브레이크가 걸린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문제로 93년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대북정책은 보수로 급선회하면서 우왕좌왕하게 된다. 경수로지원, 대북식량지원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되풀이됐다. 95년에는 북한이 2,000톤의 쌀을 싣고 가던 「시 아펙스」호에 강제로 인공기를 게양케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문민정부의 중심 없는 대북정책은 미국등 우방의 신뢰감 상실로 이어졌고, 단단한 한미공조에도 틈새가 벌어지는 근인이 됐다. 특히 한국이 당사자해결원칙을 고수하지 못하고 제네바 핵협상에서 배제된 것은 문민정부의 최대 실책이라는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후 4자회담, 96년 강릉 잠수함침투사건 해결과정 등 한반도문제에 있어서 한국보다는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주도하게 됐다.
일본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했다. 군대위안부문제 등 과거사문제로 갈등을 보였던 양국 관계는 지난달 일본의 일방적인 어업협정 파기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김영삼정부의 대외정책은 줄 것만 주고 얻은 것이 없는 실패작』이라며 『이는 문민정부라는 명분집착, 일원화하지 못한 비서실과 사조직 중심의 대북정책추진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고 비판했다.<권혁범 기자>권혁범>
□문민정부 5년 일지
93년
▲2월25일 제14대 대통령 취임
▲3월18일 국무위원,청와대수석비서관 40여명 재산공개
▲8월12일 금융실명제 전격단행
94년
▲7월8일 김일성 사망,남북정상회담 무산
▲11월17일 호주 시드니에서 세계화 구상 천명
▲12월3일 재경원 설치등 정부조직 개편단행
95년
▲6월21일 북한에 쌀 15만톤 무상지원 합의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
▲11월16일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11월24일 5·18특별법 제정 지시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96년
▲4월16일 남북과 미국 중국의 4자회담 공동제안
▲4월24일 2002년 월드컵 유치
▲10월11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97년
▲1월23일 금융개혁위 발족,한보철강 부도
▲2월25일 기아그룹 부도유예
▲11월21일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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