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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막내린 재팬드림/한국계 일 아라이 의원 자살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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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막내린 재팬드림/한국계 일 아라이 의원 자살충격

입력
1998.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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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이득혐의 부당” 결백주장 불구/“구속결정에 “정치생명 끝” 막다른 선택 19일 하오 아라이 쇼케이(신정장경)의원의 자살은 닛코(일흥)증권으로부터 부당이익을 제공받았다는 혐의에 대한 마지막 항변이자 정치생명의 마감을 앞둔 자포자기적 행동이었다.

 그는 전날 하오 자민당 의원총회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구속동의안 의결 움직임을 저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정부의 구속동의안 제출은 이미 여당지도부가 방향을 정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원총회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모두 흘러나온 정보에 의해 색안경을 쓰고 있어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진실은 하나』라며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닛코증권 관계자들과의 통화내용을 담은 녹음테이프 등을 증거로 내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태가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고 이 싸움에서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두번 다시 이자리에 돌아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니 모두들 잘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때 이미 그는 자살을 결심했던 듯하다.

 기자회견을 마친 그는 부인과 함께 도쿄(동경) 시나가와(품천)의 퍼시픽 도쿄호텔 23층 2338호로 가 하룻밤을 묵었다. 19일 하오 부인이 잠시 외출했다 돌아 와 보니 그는 이미 화장실에서 목을 매 숨져 있었다. 그는 부인 마리코(진리자·45)씨와 동료의원에게 각각 1통의 유서를 남겼으나 이번 사건과 관련된 언급은 일절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자살 소식이 알려진 직후 중의원은 구속동의안의 본회의 상정을 취소했다. 동료의원들은 『공인으로서 그런 방법을 택해서는 안된다』 『언론이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결과라는 점에서 정치인의 비애와 무념을 느낀다』 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죽음에 의한 결백 주장이 그에 쏠린 수많은 의혹을 씻어줄지는 미지수이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지난해 총회꾼에게 불법 이익을 제공해 구속기소된 닛코증권의 히라이시 유미오(평석궁부) 전부사장, 하마히라 히로유키(빈평유행) 전상무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관련 증언을 확보하고 수사망을 좁혀 왔다.

 지난해 12월부터 흘러 나오기 시작한 의혹은 그가 숨지기 직전에 나온 19일자 석간신문에 이르기까지 점점 커지기만 했다.

 또 수차례의 기자회견과 지난달 30일의 국회 청문회에서의 발언이 거짓이라는 것도 잇따라 밝혀졌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증권투자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던 시기에 장래가 촉망되는 정치인, 그것도 대장성 관료출신이 8개월 동안 5일이내에 되파는 단기거래에서 79승 10패의 놀라운 실적을 올린 것을 정확한 판단과 행운의 결과라고 믿을 사람은 없었다.

 검찰은 이미 총회꾼에 대한 이익제공 사건 수사를 통해 증권사가 자사 거래이익을 특정인의 거래 이익인 것처럼 위장해 넣어 주는 수법을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로 닛코증권 컴퓨터의 아라이의원 차명계좌 거래기록에는 실제 거래가 행해진 후에 사자 주문이 들어 온 예도 남아있다.

 더욱이 19일 상오에는 문제가 된 95년 10월 이후의 거래 외에 2억8,000만엔의 또 다른 이익을 닛코증권으로부터 제공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공소시효는 지난 것이지만 『대장성 출신의 국회의원이니 도움이 될 것』이라며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테니 월 500만엔의 이익을 부탁한다』는 요구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도쿄=황영식 특파원>

◎아라이 의원은 누구인가/한국인 차별딛고 4선 자민 개혁파 ‘뉴리더’ 막후서 민단 등 한국 지원

 자살한 아라이 의원은 일본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만 달려온 대표적 소장 개혁정치인으로 꼽혀왔다.

 양친이 모두 한국인인 그는 어린시절 차별을 당하면서도 도쿄(동경)대 경제학부와 대장성 관료를 거쳐 일본의 「정치1번지」라고 할 수 있는 도쿄 제2구에서 4선 고지에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72년 도쿄대를 졸업한뒤 신닛뽄(신일본)제철에 입사해 주경야독으로 국가공무원시험에 합격해 73년 대장성에 들어갔다.

 후생성 파견 근무중 당시 후생성장관이던 자민당 거물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비서관이 됐다. 87년 7월 총선에서 와타나베의 후원으로 도쿄2구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6선이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저자로 일본 보수파 최대논객이던 이시하라 신타로(석원신태랑) 의원을 꺾고 혜성처럼 정계에 등장한 그는 이후 늘 「뉴 리더」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94년 4월 자민당 단독정권 붕괴후의 정계개편 와중에서는 와타나베를 총리로 밀기 위해 자민당을 탈당, 자유당의 창당 주역을 맡기도 했다.

 와타나베 총리 옹립운동이 실패하자 94년 12월 신진당 창당에 참가했고, 97년 8월 개혁이미지 보강을 위해 참신한 인물 영입에 공을 들이던 자민당에 복당했다.

 그의 성공담은 재일동포 사회는 물론 일본 전역에서도 하나의 신화였다. 아라이 의원은 평소 자신이 한국계임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주일 한국대사관과 민단의 활동을 막후에서 적극 도와온 것으로 알려졌다.<김철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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