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국가와 사회발전 과정에서 정치권의 개혁이 가장 뒤져있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의 화두가 아니다. 정치문화의 후진성에서, 혹은 정당제도의 미성숙에서, 또는 3김 정치에서 그 책임을 논해왔다. 정치의 후진성 극복을 주창하는 엄청난 양의 글과 토론, 그리고 시민운동 등이 행해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국난에 직면해서도 정치권의 자세는 달라진 것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제 국가차원의 난국을 풀어나가지 못하면 현 정치권 자체가 몰락하게 되고 책임추궁의 대상이 됨이 불보듯 뻔함에도 말이다. 지금의 여소야대 정국은 미래의 전망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국회와 정당의 「무용론·폐지론」 등 극단적인 말을 서슴없이 토로하고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인들은 왜 자신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치계에 대한 비판을 「정치현실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반박하는 억지를 보이기도 한다.
정부 조직개편만 해도 그렇다. 국난극복이라는 전쟁을 담당할 전시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되어야 할 정부 조직개편을 둘러싸고 국회가 보여준 것은 합목적성과 효율성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관할권을 「독식」하려는 파워 게임이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국가 경제사무의 핵인 예산담당부서의 머리와 몸통을 갈라놓고, 공무원 인사행정의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는 인사위원회를 살짝 빼놓고서 이 모두를 여야간 「타협완료」라고 한다면 국민을 우롱하는 일이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것은 밤을 새면서 정략적 타협의 술수를 익히는 일이 아니라 국난극복을 위한 최선을 찾으려는 밤샘인 것이다. 게다가 선거사범을 풀어주자는 얘기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시대정신과 의지가 실현될 리 만무하다. 민주주의와 경제라는 두 깃발은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의 기본적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여소야대 정국은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정국안정 마저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점령군의 이미지를 풍겨온 각종 위원회는 며칠후에 사라질 한시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최근 국회에서의 여야의 행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현 시점에서의 정치권의 개혁과 구조조정은 단순히 정략적 타협이나, 합종연횡을 통해 정계개편을 도모하는 수준이어서는 아니된다. 정치권의 근본적인 자아에 대한 성찰과 시대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많은 식자들의 생각이다.
우선 정치인들로 하여금 현 IMF위기가 단순히 경제영역에서의 위기만 아니라 세계화 과정에 의해 「민족국가체제」 존립의 근거가 와해되어나가고 있다는 냉엄한 시대인식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 현실에서의 국회와 정당의 존립이유는 민족과 국가와 주권에 대한 가치를 최상으로 여기는 국민정서와 믿음이다. 따라서 IMF 위기극복의 실패는 곧 정권 차원이 아닌 현존 국가체제의 붕괴를 의미하고 결국은 정치인의 설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 상황에서 왜 보스정치의 존속이 필요한가를 물어야 한다. 과거에는 보스가 「돈줄」과 공천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 이러한 구태와 폐습은 사라져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고 국민의 정치의식은 생각보다 높다. 국회의원 각자가 하나의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사실을 재인식해야한다. 따라서 의원 개인의 정책개발과 개진능력이 중시되어가는 것이다. 의식있는 정치인들이 앞장서 갈 수 있는 객관적 상황이 마련되어 있음을 왜 모르는가.
국회의원 개개인은 일차적으로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국민)에게 책임을 져야한다는 철칙을 모르는 정치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수기」 노릇과 「전위전투대원」 역할을 마다 하지 못했음은 정당이념과 정책지향성에 투철해서가 아니라 당내에서의 소외와 보스의 파워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유권자)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해야 할 때이다.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총리인준 문제도 이런 점에서 개별 국회의원의 역사인식과 판단에 따라 표결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집단적 힘의 경쟁이 아니라 개인적 자율성과 능력의 실현이 우선된다는 점을 생각할때 우리의 국회도 기명표결제도를 도입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정략과 술수가, 그리고 줄서기 정치가 먹혀들어갈 시대는 갔다. 이제 정치개혁의 깃발을 올려야 할 때이다. 그러나 개혁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소야대를 탓하기에 앞서, 정치권의 자정과 개혁을 위해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난극복은 대통령과 행정부가 홀로 뛰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야 정치권의활성화와 민주적 국정수행을 도모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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