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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없는 시대에의 회한/진덕규 이화여대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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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없는 시대에의 회한/진덕규 이화여대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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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칼럼을 쓰면서도 몇차례나 망설여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을 헐뜯으려는 의도 같은 것은 더더욱 가지고 있지 않다. 되돌아 보면 오늘의 이 상황­하루 아침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고 30년 넘게 고생해서 이룬 것들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이 가져다준 허망함 때문이다. 할 말을 잃었다 해도 좋고, 넋을 빼앗겼다해도 좋을 그러한 감정으로 꽉 차 있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해도 양입계출하는 법인데 항차 나라를 맡았으면서도 들고 나는 경제를 외면한 채 이 지경으로 전락시킨 대통령이 원망스럽고 그 대통령 밑에서 한자리 했던 그 사람들도 야속하고 그리고 그들의 말만 믿고 안주했던 내 스스로가 지금 생각해도 한스러울 뿐이다. 그러한 사람을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나는 분명히 남보다 앞장서서 표를 찍었고 더더욱 그 대통령에게 한 때는 대단한 가능성까지 걸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없이 죄스러울 뿐이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나는 이 칼럼 담당기자와의 지난날의 오랜 약속 때문에 회한과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을 삼키면서 지금 이렇게 쓰고 있다. 매명을 위해서나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닌 단지 이렇게라도 말해야만 죄스러움의 만분의 일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와 사회를 공부한다면서 그 속에 안주한채 그럭저럭 삶의 전부를 다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나마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 나라도 고맙고 사회도 고맙고 학교도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나라와 사회, 그리고 그분들을 위해 한 것이 없었다. 무슨 대단한 학문적 이론을 주장한 적도 없었고 헌신적 열정으로 교육에 몸바친 적도 없었으며 애국적 결단으로 육신을 던져본 적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살았으며 그냥 저냥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몸을 맡긴 채 용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마도 나의 이러한 작태의 결과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오늘의 이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그렇게 축적된 내 삶이 요즘 흔하게 쓰는 말로 「거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러한 것들로 변모된 것만 같은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본질을 외면한 채 겉치장에 몰두했으며 「나」다움의 가치보다는 시세에 편승해서 모방하는 일에 전념했으니 그 거품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공부한 내용이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집요하게 묻고 대답하는 실학적 연구가 아니라 한낱 외국의 이론들, 그것도 우리와 별로 연관되지 않는 것들을 무슨 대단한 학론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고답적으로 주장했으니 그것이야말로 대표적인 거품이요 허학적인 것에 불과했을 뿐이다. 강대국 헤게모니와 IMF를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밀어닥칠지를 전혀 예상조차 못한채, 마치 미국선생이 미국학생들에게 가르치듯 그렇게 했으니 참 기막힐 뿐이다. 지난 날의 영광에만 안주하면서 그것만을 지키려는 배타적인 시도만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이 엄연한 시대성을 왜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겸손과 절제, 그리고 자기 성찰만은 더 할 수 없는 가치인 것을, 그리고 그것만이 삶의 현실적 실천의 잣대임을 왜 강조하지 못했을까.

 오만과 과시, 여기에 편견까지 겹쳐져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당장 선진국으로 올라 선 것처럼 선전했다.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면서 멀지 않아 영국을 능가할 것이라는등 실로 겁없이 떠들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게 변했는데도 이 땅의 지식세계는 실학적 기반을 상실한 허학의 변두리만을 맴돌았을 뿐이다. 어느 경제학자가, 어느 정치학자가, 어느 사회학자가 IMF의 이 높은 파고를 예견했던가. 그것이 밀어닥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가. 그런데도 경제학이며 정치학이며 사회학등의 이름이 지식시장에 여전히 내걸려 있고 그 주장이 강물처럼 범람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시대 어느사회나 겸손이 무너지고 공손함이 사라지면 이미 그 사회는 전락의 문턱에 놓여져 있는 것을. 조금만 눈을 들어 바라보면 우리의 일상성 속에서 겸손대신에 거만함이, 공손함 대신에 오만이, 절제 대신에 과시가 가득찬, 실로 거품의 천국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이 바로 IMF를 불러오게 한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거품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던 지적 세계의 그 허학적 논리가 실학적인 것으로, 자리바뀜할 수 있는 그 날이 올 수 있어야 비로소 오늘의 이 위기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다. 거품을 걷어내는 이 고통스러움에 앞장설 수 있는 학문적 자기성찰, 그것이 곧 허학적인 것에서의 벗어남이며 실학적인 것으로의 자리매김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적 보편성의 확립일 것으로 여겨진다.<역사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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