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40대 중반이셨던 때 기자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지금의 내딸 나이와 비슷했다. 당시 당신은 틈틈이 거북등처럼 갈라진 발바닥을 시퍼렇게 날이 선 낫으로 깎아내셨다. 맨발로 농사를 하신 탓이다. 기자도 요즘 목욕탕에서 일회용 면도날로 발바닥의 군살을 깎아내곤 한다. 어릴 때 이리저리 기운 고무신이 거추장스러워 맨발로 뛰어 논 것이 군살이 됐다. 그 군살을 도려내며 40대 중반인 내가 과연 당신같이 열심히 살고 있는지, 딸아이에게 근엄하면서도 자상한지 등을 생각해본다.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사태로 제자리를 잃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정리해고나 생활의 어려움에 가족을 버리고 자살하는 가장, 용돈이 부족해지자 범죄를 서슴지 않는 10대, 예·공금을 횡령하는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종사자들이 그들이다. 고비용 정치구조의 개혁을 외면하거나 재선행보에만 정신이 팔려 국민들의 고통최소화에 앞장서지 않는 정치인이나 지방자치단체장도 예외가 아니다.
자리에는 책임이 수반된다. 가장은 가정을, 정치인과 공무원은 국민을, 기업은 경제와 근로자를 책임져야 한다. 현재의 고통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해 빚어졌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IMF사태를 악용하는 경향까지 있다. 생활비가 없어 집을 줄여야 하는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빼주지 않는 집주인, 제몫챙기기와 힘겨루기로 정책결정을 실기해 국민불안을 가중시키는 정치인, 근로자를 잘라내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는 몰염치한 기업인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때문에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리해고나 파견근로 등 새로운 제도가 합법화한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얼마나 많은 근로자들이 「합법의 칼」아래 거리로 내몰릴지 모른다. 「근로자의 방패」는 그 칼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데서 우려는 커진다. 이는 이달들어 구직자가 하루평균 3,000명을 넘어서고 1월보다 43%나 증가한데서 잘 드러난다. 새 제도가 합법화되기 전에 이미 해고의 칼이 마구 휘둘려져 왔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약자를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불안정한 사회다. 이제 정부가 할 일은 자명해졌다. 고통받는 근로자를 진정으로 생각함으로써 국민불안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이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운용돼서는 안된다.
기자가 감히 아버님과 비교해보는 것은 일흔이 훨씬 넘으신 지금도 자식사랑에 일손을 놓지 않으시는 당신처럼 가장의 책임을 다하자는 다짐이다. 또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 IMF사태의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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