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의 홍길동 조동하(한국의 추억)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의 홍길동 조동하(한국의 추억)

입력
1998.02.16 00:00
0 0

◎재주많고 열정불타는 ‘30년지기’/65년 대만서 첫 인연/춤솜씨·사교력 탁월/지금은 보험계 종사/부인 ‘마거릿 조’는 12년간 육 여사 비서/활달한 성격 인상적/통일원고문 참여때 김영선·김정렬씨 등 처음 교류기회 가져 한국에서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동하(보험신보 편집위원)씨 부부와의 인연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조씨 부부를 빼놓고는 우리의 한국 생활을 논할 수 없을만큼 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그들은 우리 이야기의 중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동하씨는 중국 당나라때 시인인 이백이 노래한 금릉주사유별을 연상케 하는 그런 친구중 한 사람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청군시문동류수 별의여지수단장·물어 보라 동으로 흐르는 물에· 이별의 이 슬픔과 친구의 사랑중 어느 것이 기냐·Go ask this river flowing to the East if it can travel as far as a friend`s affection)』고 읊었다.

 아무튼 수년동안 나는 그에게 『당신은 독일 신화에 나오는 틸 유렌스피겔을 닮았다』고 농담했다. 유렌스피겔은 장난기 넘치는 꼬마 주인공으로 자주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한국 신화에도 그와 비슷한 인물이 등장한다. 홍길동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그는 신비스런 재주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조동하씨를 「조길동」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곤 했다.

 연세대 정외과 출신인 조씨는 한국전에 참전한 뒤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로 유학갔다. 그곳에서 조씨는 나중에 배필이 된 한국인 유학생 나은실씨를 만났다. 나은실씨는 그때 이미 마거릿이라는 영어 이름이 있었는데, 그녀의 한국 친구들조차 (결혼하기도 전에) 그녀를 마거릿 조라고 불렀다.

 나은실씨는 박정희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비서관(2급)을 지내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무려 12년동안 비서관 자리를 지켰다. 특히 그녀는 육여사가 74년 8월15일 암살된 뒤에도 대통령 가족을 돌보기 위해 1년동안 청와대에 더 머물렀다. 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암살이라는 비보를 접하자마자 아내 세니와 함께 조씨 부부에게 위로 전화를 건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마거릿은 첫 대면때부터 활달한 성격과 미모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녀는 심각한 대화는 물론 농담과 장난에도 기꺼이 참여하려고 했다. 젊었을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거들 만큼 미모도 빼어났다. 그녀의 미모는 나이가 들면서 우아함과 조화를 이루었고 할머니가 된 지금도 쾌활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뛰어난 여성은 다양한 문제에 대한 나름의 뚜렷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데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때마다 조동하씨는 눈알을 말똥말똥 굴리면서 『이게 바로 마거릿이지』라고 말하곤 했다.

 마거릿이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조동하씨가 곤란을 겪을 때도 있었다. 남성 우월의식이 뿌리깊은 한국 사회에서 그는 종종 「마거릿 조의 남편」이라고 불렸다. 그는 그러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고개를 으쓱대며 웃어 넘기곤 했다.

 조동하씨가 부인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사업을 도모하거나 돈을 벌려고 작정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같은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성정이 곧은 사람이었다. 비록 춤에 소질이 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플레이보이」라고 놀림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신명을 다바쳐 조국을 위해 봉사했다. 그는 그리고 조국의 미래는 밝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초창기에 조동하씨는 김종필 현 자민련 명예총재와 함께 아시아반공연맹에서 일했다. 연맹본부는 (남산에 있는) 자유센터에 있었는데 이 건물은 유명한 건축가인 김수근씨의 작품이었다. 내 친구이기도 한 김수근씨는 상도 여러차례 받았으며 후에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했다.

 조동하씨는 65년 대만을 방문했다. 나도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대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아 대만 사회과학원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와 조동하씨는 이내 친해졌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이듬해인 66년초 타이베이(대북)에서 한국 여행길에 나섰다. 서울에서 나는 강의와 함께 미 공보원(USIS) 고문역을 맡기로 했는데 이런 일들은 「조길동」이 주선했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을 여러번 방문했지만, 아내에게는 그때가 첫 한국 나들이었다. 아내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매료됐다. 한국은 이후 아내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우리는 당시 구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나는 당시 방문을 통해 박 정권하에서 진행되고 있던 경제개발의 징후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서울의 삶은 여전히 가혹하고 고달팠지만, 새로운 활력과 뚜렷한 목적의식 등은 눈에 잡힐 듯 뚜렷했다.

 66년 최초의 「가족 여행(Family Visit)」을 하는 동안 우리 부부는 마거릿과 조동하씨 양가와 급속히 친해졌다. 마거릿의 어머니 마리아 나(이마리아)는 한국 YMCA의 지도자였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또 한국 기독교계의 거물급 지도자인 한국계 미국인 에스더 박도 알게 됐다.

 조동하씨 부부는 당시 마거릿 부모와 함께 혜화동에 있는 전통 한국 가옥에서 살았다. 서울 북부지역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 동네는 한국전 당시에도 별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우리는 이후 거의 해마다 조동하씨 가족을 방문했으며 더러는 두번이상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3명의 조동하씨 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고, 한국 가족의 소중한 가치들을 더욱 존경하게 됐다.

 그때 이후 30년이 넘도록 나는 항상 조동하씨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자녀들, 그리고 이제는 손자들까지 낀 가족 사진으로 장식된 카드에다 그해 자신의 가정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적어 놓았다. 카드에는 또 항상 적절한 유머와 함께 그해 한국에서 발생했던 변화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이 담겨 있었다.

 마거릿이 청와대에서 재직할 무렵 조동하씨는 오하이오 주립대 국제관계연구소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는 한국에서 69년 각료급 부처인 통일원(NUB)이 창설되자 NUB에서 차관보급으로 일하기 위해 학업을 이어갔다. 나는 조동하씨를 통해 NUB를 위한 최초의 외국인 고문단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NUB 고문직을 맡은 나는 한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기회를 누렸고, 다양한 한국 지도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김영선 당시 통일원 장관과 훗날 미국대사를 지낸 김정렬(일명 마이크 김) 장군등이 그때 만난 대표적 인물이다.

 NUB와 관련된 수많은 유능한 한국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나는 국가에 헌신하는 그들의 열정과, 조국에 대한 그들의 희망에 존경심을 갖게 됐다. 나는 또 NUB와 함께 일한 덕분에 한국의 역사를 탐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한국 문화와 그 양식들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그 진수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게 됐다.

 나는 72년 조동하씨가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연구소(IIS)에서 연구원 자격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그는 한 학기동안 우리와 함께 한국과 한국문화에 역점을 둔 연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후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조동하씨와 나는 한국무역협회내 한미경제위원회에서도 연구활동을 했다. 당시 나는 이곳에서 김태동 박사와 인연을 맺은 뒤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박사는 부부동반으로 우리를 찾아 사우스 캐롤라이나주를 방문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비극적이게도 82년 2월 일본 도쿄(동경)의 한 호텔에서 화재로 숨지고 말았다.

 조동하씨는 이후 민간부문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처음에는 김종희 한국화약그룹 창업주와 함께 일했으며, 지금은 자신의 사업인 보험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 시기 내내 세니와 나는 조동하씨의 다양한 친구들과도 안면을 익히게 됐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등에서 서구 교육을 받았고 국제적 식견도 상당했다. 우리는 또 한반도 방방곡곡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렸다. 여행할 때마다 우리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토론도 벌였다.

 조동하씨 가족과 또 다른 긴밀한 한국 친구들을 통해 나는 한국에서 집단을 결속시키거나 혹은 이간하는 요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조동하씨는 경기중고 출신이고, 마거릿도 경기여중고를 다녔다. 조동하씨 부부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동창간 유대가 얼마나 강한지를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동창생간 유대는 주로 출신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조동하씨 가족과 지내면서 우리는 많은 한국의 관습과 명절, 그리고 한국식 자녀 양육법에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족의 가치를 항상 중심부에 놓고 유지하는 한국민들의 생활태도에 탄복하게 됐다.

 형을 존경하는 조동하씨의 모습도 관찰할 수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의 형은 외과 개업의였다. 나는 조선시대때 관리를 지낸 할아버지를 포함한 그의 가족 배경도 알게 됐다. 이런 경험을 한 나는 몇몇 한국 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한국문화와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내가 주한 미대사로 서울에 도착한 81년 8월 이전까지 이미 우리의 관계는 15년이나 지속됐다. 이 기간동안 우리는 조동하씨 부부와 함께 한국의 관광 명소들을 두루 여행했다. 우리는 속리산에서 주말을 보낸 적도 많았다. 법주사등 아름다운 사찰과 호젓한 오솔길은 산행의 맛을 더욱 깊게 했다. 또 대천 해수욕장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물론 현대와 대우등 대기업들이 건설중인 새로운 산업현장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울창한 제주도를 방문해서는 난생 처음 그 유명한 해녀들이 바닷속에서 진주등을 캐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해녀들과 아름다운 섬 풍경은 우리의 넋을 빼낼만큼 매혹적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산하를 여행하면서 나는 고향에 대한 한국민들의 강한 애착도 이해하게 됐다.

 나는 또 조동하씨를 통해 맛본 한국에서의 밤의 유흥에 대해서도 고백해야 겠다. 기생파티에 몇차례 참석한 적이 있는 나는 밤의 유흥활동에 익숙해졌다. 조동하씨는 이 방면에 정말 탁월했고 「플레이보이」로서의 명성을 누릴 재능이 충분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 유학시절 춤 교습소인 「아더 머레이」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강사를 지낼만큼 춤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여흥시간에는 언제나 확실하게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또 엄청난 주량으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이런 단면은 그러나 술자리에서나 드러날 뿐 일상생활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나는 조국에 대한 열렬한 충정과 한미관계를 향한 그의 결심이 이런 단면 때문에 조금이라도 손상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동하씨야말로 한미 양국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가장 열렬히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번역=이종수 기자>

◎그때 그사람/김영선 장관과 김정렬 장군/김영선 통일원장관때 ‘북한학’ 체계 수립/김정렬 국방장관등 역임 공군창설 주역

 70년대초 리처드 워커 전주한 미대사가 통일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인연을 맺은 김영선 당시 통일원장관은 전문관료와 정치인, 외교관 등으로 활약했다. 2, 3, 5대 의원인 그는 민주당 장면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내다 5·16 이후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장관 재임시절 「북한학」 체계를 세우는데 주력했다. 이후 74년 1월부터 5년넘게 주일대사를 지낸 그는 87년 2월 6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정렬 장군은 국방장관, 초대 공화당의장, 주미대사등을 역임했다. 일본군 비행대장 출신인 그는 공군창설의 1등공신이며, 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으면서 워커 전대사와 각별한 사이가 됐다. 그는 5공말인 87년 7월부터 88년 2월까지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75세때인 92년 9월 사망했다. 한편 12·12 재판당시 검찰은 그가 『신군부를 대신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를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