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독특한 제도가 하나 있다. 5억이나 10억이 부도나면 수표발행자는 즉각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혐의로 철창 신세가 된다. 하지만 부도액수가 100억 단위만 넘어서면 상황은 달라진다. 거액을 떼이게 된 은행측이 부리나케 찾아와 『돈을 더 빌려줄테니 제발 사업을 계속해 보라』며 통사정한다. 소위 「대마불사」론이다. 이런 악폐는 한보·기아그룹의 처리과정에서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부도난 기업은 법정관리 신세가 됐지만 경영권은 못 내놓겠다는 것이 재벌총수들의 하나같은 행태였다. 또 수천억원씩 부도가 나도 부정수표단속법에 저촉돼 총수가 감옥에 갔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몇천만원 부도로 옥살이하게 된 사람들은 『어차피 은행 돈을 쓸 바엔 왕창 끌어쓸 것을…』이라며 가슴을 친다. 국내 기업이 유난히 외부차입이 많은 배경에는 이같은 관행이 한몫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경련은 12일 회장단회의에서 30대재벌의 계열사 상호지급보증 채무를 신용보증 채무로 전환해 줄 것을 차기 정부와 금융권에 건의키로 했다. 새 정부가 상호지급보증의 중단과 조속한 해소(99년말)를 요구하자 기업 자금난이 심화되고 구조조정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구조조정 차원에서 돈을 빌리려 해도 은행들이 지급보증을 요구한다면서 『차제에 상호지급보증 제도를 없애 선진국처럼 신용대출로 바꾸자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이는 전경련 주장의 요지는 이러하다. 은행의 상호지보 요구 관행 때문에 기업이 끌려들어간 결과이니 상호지보 해소를 위한 책임도 은행과 기업이 나눠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은 은행 돈을 쓸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은행이 상호지보라는 묘한 장치를 만들어 서류 한장으로 수천억원, 수조원을 쓸 수 있게 허용한 셈이니 은행은 책임이 없느냐는 얘기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전경련의 논리는 『길에 새끼줄이 떨어져 있길래 주워왔더니 황소가 그 끝에 달려 있더라』는 소도둑의 변명과 무엇이 다른가. 여론이 재벌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초점은 기업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지나친 차입 의존을 고치라는 것이다. 문어발을 자르는 아픔을 감수하며 상호지보 해소와 과다대출 축소를 빨리 실천하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상호지보는 은행탓이니 신용대출로 전환하자는 주장은 달을 보랬더니 손가락만 보겠다는 억지다.
12일 밤 민주노총은 마라톤회의를 거쳐 13일의 총파업을 전격 철회했다. IMF 국치를 벗기 위해 「나」를 버리고 「우리」를 찾는 결단을 내렸다. 국치 이후 지금까지 재벌은 과연 무엇을 실천했나. 총수 사재출연, 빅딜, 회장실·기조실 폐지 등 개혁카드가 제시될 때마다 온갖 변명을 내세워 고개를 흔들었고 급기야 상호지보 문제까지 들고 나온 게 전부다. 이제 대다수 국민들은 참고 기다릴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고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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