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협상 오래끌면 심각” YS압박/IMF협상 착각의 10여일/외환위기 벗어날것 순진한 기대/미일 무차별 돈회수로 주가·환율 요동/막판 몰려 내줄것 다 내주고…/서명당일까지 ‘후보 보증서’ 소동 지난해 11월21일 밤.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요청을 TV 생방송으로 공식발표했다. 『IMF가 지원하기로 한 이상 국제금융시장에서 우리의 단기자금을 회수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일본도 동참할 것이며, 미국도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임부총리) 국민들은 잠시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되돌아 갈 수 없는 고통의 터널에 진입했음을 안 것은 「착각」과 「부정」의 10여일이 지나서였다.
22일 상오 9시. 재정경제원 금융협력관실. IMF로부터 수십쪽의 자료요청서가 팩시밀리로 날아들었다. 통화 환율 금융기관재무제표 금융산업구조조정방안 재정·거시경제지표 등. 같은 시간 워싱턴. 미셸 캉드쉬 IMF총재의 기자회견. 『한국이 금융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충분한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 정부가 23일 강만수 재경원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협의단을 구성, 협상전략을 숙의할 무렵 IMF 실무협의단 1진이 서울에 입성했다. IMF의 준비는 완벽했다.
24일 상오 10시. 첫 상견례. 협상의 이상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김우석 재경원국장. 『IMF의 지원목적이 한국경제를 얼마나 신속하게 정상화시키느냐에 있는 만큼 (협상에) 큰 이견이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본진이 도착하는 26일 이후 이르면 열흘이내에 협상이 마무리될 것 같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달랐다. 협상분위기와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협상결과를 너무 빨리 읽고 있었다. 22일 주가가 15.64포인트 떨어질 때만 해도 IMF 후광이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24일, 10년4개월만에 최저치인 441.02로 마감됐다. 「IMF 주가」는 이후 단 하루도 상승하지 못한 채 협상이 타결된 12월3일 339.31로 내려 앉았다. 환율은 달러당 1,200원대를 돌파했고, 가용외환보유고는 60억달러로 줄어 들었다.
재경원 K국장의 증언. 『IMF가 지원에 나서면 외환시장이 빠르게 안정될 것으로 생각했다. 정말 예상밖이었다. 지원을 기대했던 일본과 미국은 물론 각국 은행들이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회수했다. 하루에 21억달러까지 빠져 나가기도 했다』 강경식 부총리의 「펀더멘털(Fundamental·경제기초)론」에 길들여진 국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분명 일시적 위기라고 했는데….
캐나다 밴쿠버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김영삼 대통령은 24, 25일 하시모토 류타로(교본룡태랑) 일본 총리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잇따라 만났다. 『한국 금융시장이 안정되면 아시아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세계 정치 경제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김대통령) 『한국도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하시모토) 『최대한 한국입장을 지원하겠습니다』(클린턴) 클린턴은 회담전 『긴급지원을 요청한 해당국 당국자들이 책임있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IMF가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론은 「IMF를 거쳐라, 개별 지원은 어렵다」였다. 한국경제에 대한 불신이 역력했다. 이를 입증하듯 다음날 미국의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사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로 2단계 하향조정했다. 불과 한달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금융상황은 악화하는데 당국은 이를 인정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를 계속 꺼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IMF에도 갔는데』 당시 정부의 대응을 보자. 22일 12개 종합금융사 외환업무 개선명령(만기불일치 연말까지 해소). 25일 금융기관 원리금 3년간 전액지급보장, 8개 종금사 외화자산부채 은행에 양도권고. 26일 은행 증권 투신 등을 통한 8조5,000억원의 증시 투입. 예금인출 등으로 위기에 몰린 종금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여신회수에 나섰다.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도 시중에 돌지 않아 금리는 폭등했다. 상장사들이 이틀에 한개 꼴로 넘어졌다. 급기야 전경련은 27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대출금 상환유예와 금융실명제 전면유보를 건의했다. 한나라당과 국민회의가 곧바로 화답했다. 하지만….
28일 아침. 청와대 본관 집무실. 캠프 데이비드에서 골프로 추수감사절 휴가를 보내고 있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2시간후 전화통화를 하고 싶어한다』 의외였다.
양국 정상간 전화통화는 24시간전에 통보하는 게 외교 관례였다. 『IMF와의 협상을 12월1일까지 끝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국제금융계로부터 심각한 응징을 받을지 모른다. 협상타결시 미국은 2선에서 자금을 지원하겠다』 15분가량의 통화는 일방적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미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곧 60억달러로 감소, 12월 첫째주에 채무불이행(디폴트·Default) 상황에 이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김대통령은 임부총리를 호출했다. 『빨리 끝내라』 그날 밤 협상테이블이 재경원 회의실에서 IMF 실무협의단 숙소인 힐튼호텔로 옮겨졌다. 85년 건국이래 최대규모 국제행사인 IMF·세계은행(IBRD) 연차총회가 열렸던 곳. 당시 경이적인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찬사가 쏟아졌던 장소. 바로 그곳에서 한국에 대한 법정관리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틀후인 12월1일 새벽 0시20분. 협상장소인 힐튼호텔 지하 국화룸 앞. 맞은편 나이트클럽 파라오에선 젊음을 만끽하는 환희의 찬가가 굉음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임부총리.『양측 실무선에서 협상안이 만들어졌다. 상오중 캉드쉬 총재와 전화통화를 해 몇가지 조율할 것이다. IMF실무단이 우리정부와 협상하면서 총재의견을 충분히 반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협상이 타결됐다는 시사였다. 몇시간전 재경원 간부. 『우리가 너무 협상을 잘해서 워싱턴 본부에서 IMF협의단을 질책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협상은 그로부터 이틀하고도 20시간이 지나서야 마침표가 찍혔다.
28일 임부총리는 전격 방일했다. 하오 6시45분 미쓰즈카 히로시(삼총박)대장성장관을 만났다. 『일본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일본은 한국이 IMF와 합의를 조기에 끝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합의가 이뤄지면 IMF를 중심으로 국제적 틀 안에서 충분하고 적절한 지원을 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듯 지극히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미쓰즈카 장관의 뇌리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던 한국 대통령의 말이 맴돌지는 않았을까. 재경원 K과장 회고. 『허탈했다. 일본과 담판을 지을 만한 사람이 없을 만큼 외교라인이 끊겨 있었다』
임부총리는 왜 일본에 갔을까. 정부는 IMF와의 협상도중 내내 미국 일본 등의 개별 지원에 매달렸다. IMF 지원금이 적어야 조건도 줄어든다는 논리에서였다. 12월1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6개국」재무장관회의. 강만수 차관은 중국측으로부터 의미있는 냉소를 받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달러에 불과한 나라가 1만달러가 넘는 나라를 지원할 경우 국내 정치적으로 설득하기 어렵다』(류지빈·유적빈 중국 상무부부장)
12월1일 상오 10시30분. 캉드쉬총재와 통화한 임부총리는 낙담했다. 『캉드쉬 총재가 「마지막 마침표가 아직 안찍혔다」고 말했다』는 외신은 사실이었다. 하오 3시로 예정된 긴급국무회의는 다음날로 연기됐다. 재협상. 12개 부실종금사 정리, 은행에도 같은 조치, 자본시장 개방,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엄청난 요구들이 쏟아졌다. 정리 종금사를 9개로 간신히 줄였다. 그날 밤 임부총리. 『2일 상오까지는 모든 협상이 마무리될 것이다』 2일 상오 8시30분. 청와대 본관. 국무위원과 비상경제대책자문위원 연석회의에서 IMF 차관 합의의향서를 의결할 예정이었다.
옆방에서 캉드쉬 총재와 통화하던 임부총리는 거의 수화기를 놓칠 뻔했다. 『협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협상타결 얘기를 언론에 꺼내지 말라』 이날 국무회의는 또 무산됐다. 정부 관계자 C씨의 증언. 『재협상이 시작된 (11월)30일부터 데이비드 립튼 재무부차관이 협상장에 있었다. IMF측은 그와 협상결과를 일일이 상의하는 것 같았다』
3일 상오 7시35분. 마침내 캉드쉬 총재가 도착했다. 두시간후 협상안에 서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캉드쉬 총재는 시간을 끌었다. 『3당 대선후보들의 합의각서가 필요하다』 『곤란하다. 대통령이 있지 않느냐』 임부총리와 캉드쉬 총재의 30분간 회동은 결론없이 끝났다.
잠시후 청와대. 『대통령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겠으니 빨리 협상을 마무리해 달라』『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캉드쉬 총재는 미동도 안했다. 결국 대선후보들의 보증서가 전달됐다. 하오 7시40분. 임부총리와 이경식 한은총재는 캉드쉬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 합의의향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이제 끝난줄 알았다.
◎‘국제음모’있었나 없었나/외신 “위험” 보도전 미 대출금회수/“아 길들이기,최종 타깃은 중국”설/“홍콩·대만은 위기극복” 반박논도
국제통화기금(IMF)에 달려간 이후에도 외환위기가 진정되지 않자 「음모론」이 꼬리를 물고 제기됐다. 「태국에서 시작된 동남아 위기는 미국과 초국적 자본(특히 유대계 자본)이 아시아 경제를 길들이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됐고, 한국에 이어 최종 타깃은 중국이다」는 것이다.
그 논리는 이렇다. 중국에 홍콩이 반환된 다음날부터 동남아 통화위기가 시작됐다.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에서 미국 금융기관이 대출금을 회수한 다음에야 외신들이 「위험하다」고 보도했다. 곧바로 미국의 분신인 IMF가 수습하는 형태로 사태가 진행됐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총리는 『외국 투기자본의 음모로 2,000억달러의 부가 동남아에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일부 전문가들도 구소련 붕괴이후 미국이 고속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견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이후 미국의 부는 커진 반면 아시아 등 개도국은 침체되는 「서고동저」현상이 뚜렷해졌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 금융위기를 풀어가기 위해 지난해 9월 일본이 주도한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을 11월18일 좌절시켰다. 공교롭게도 이후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급격히 악화했다.
재정경제원 당국자의 회고. 『외국인이 주식시장에서 슬금슬금 빠진뒤 종금·은행의 만기연장이 불가능해졌다』 『특히 IMF에 지원을 요청한 이후에는 상황이 더 악화, 외국자본이 마치 사전각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경식 전 부총리가 퇴임직전 『거대한 그물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
「음모론」은 실책에 대한 책임회피와 함께 외국압력에 대한 단결촉구라는 이중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홍콩과 대만은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않았느냐. 면피성 논리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밀려 수그러들고 있는 상태다. 성공한 음모는 드러나지 않는 법. 때문에 설사 있었더라도 검증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특별취재반
이상호 경제부차장대우
정희경 경제부 기자
이성철 경제부 기자
김준형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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