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정치」라고 말할 때 깔려 있는 뜻은 대부분 그 폐해의 측면이다. 가신들은 주군을 둘러싸 인의 장막을 만들고 신임을 독과점하면서 특권을 누린다. 또 주변과의 차단은 정보와 판단의 정상적인 흐름을 막게 된다는 게 폐해로 얘기된다. 한국의 야당정치에서 가신집단의 형성은 강경 군사정부에 대한 반사작용인 측면이 강했다. 과거 야당의 가신들은 보스를 위해 감옥을 대신 가고 고문도 대신 받았다. 동양적인 가치기준에서 보면 대단한 미덕으로 평해 주어야 할 이유들이다. 권노갑 김덕룡씨 등이 바로 야당 가신의 상징들이다. 이런 의미에만 한정한다면 장세동씨도 가신으로 불러 줄 만하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청와대비서진에 그의 가신들이 한명도 없는 것은, 새삼스럽긴 하지만 가장 큰 특징이 아닐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방식과 비교할 때 이는 더 두드러져 보인다. 김중권 당선자비서실장이 『종전과 같은 스타일을 지양하겠다는 것이 김당선자의 확고한 소신』이라고 인사배경을 설명한 대목에서도 이는 다시 부각된다. 그러나 요직에 중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신들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신의 역할이 필요한 때가 아닐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성에 치중한 인선이라 해도 당선자의 의중을 피부로 알 수 있기로는 가신들의 「전문성」을 따라가기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5년전 김영삼정부 초대 비서실장이 박관용씨로 발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었다. 그는 소위 상도동계에서는 방계로 분류됐던 비가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명석한 두뇌와 합리적 처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비서실장 임명은 잘된 인선으로 치부됐었다. 지금와서 그가 비서실장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긍정과 부정이 양분되는 양상이다. 그런데 민주계 내부로 들어 갈수록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더 강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오히려 민주계 실세가신들에게 휘둘리는 바람에 일을 더 잘할 수 없었다는 역설이 사실일 수 있는데도 그렇다.
가신정치의 배격은 새정부 인사의 절대명제로 돼 있는 양상이다. 인물자체를 따져볼 겨를도 허용하지 않는 게 요즘 시류이다. 물론 당연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다. 김중권 실장의 기용에 신선한 발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워낙에 한국정치에 길들여진 시각인 탓인지 동교동가신들의 그림자는 금세 지워지지가 않는다. 지난 9일 정무수석 결정과정에서 당쪽의 기류를 진언해 김당선자의 결심을 이끈 특사가 가신의원이었던 장면도 그런 인상을 남긴다. 다만 대통령당선자가 가신배제를 우선적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현실은 한국적 정치의 단면을 또하나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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