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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의 시대 아랫목같은 이야기/김주영 새 장편소설 ‘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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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의 시대 아랫목같은 이야기/김주영 새 장편소설 ‘홍어’

입력
1998.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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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덮인 산골마을 오지않는 아버지와 길떠나는 어머니/지난날의 그리움은 잔설처럼 녹아들고 훈훈해지는 가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시대와 인간을 문학이 조금이라도 위무해줄 수 있다면 김주영(59)씨의 장편소설 「홍어」(문이당 발행)는 바로 그런 문학이다.

 이미지로 말하면 「홍어」는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들여다보고 또 보아 네 귀퉁이가 닳아버리고 색깔마저 변해가는 것같지만 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 주고 또 가라앉혀 주는 지난 시절의 사진 한 장.

 태백산 끝자락 산골마을. 홀어머니와 열 세살 소년만이 살고 있는 집에 폭설이 소년의 잔허리께까지 덮이도록 내린 어느날, 한 걸부새이(거렁뱅이) 처녀가 눈나비처럼 찾아든다. 아버지는 삼 년 전 집을 떠나고 없다. 부엌 문설주에 사시사철 매달려 있는 홍어가 어머니에게는 바로 아버지를 상징하는 존재다. 음력 섣달 초사흩날 찾아왔다 해서 어머니는 이 이름도 없는 처녀에게 삼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피붙이처럼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소설의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남편을 기다리며 삯바느질로 삶을 이어가면서 아들에게 회초리를 들면서도 종내는 「제사상에 떨어지는 촛농처럼 서럽게 흐느끼고 마는」어머니, 「진펄에 개구리 뛰듯 방천둑을 오가며 해질녘까지 가오리연을 날리는」 아들, 「이 설국 어느곳에 요행으로 눈이 내리지 않은 별개의 공간이 없는 한, 눈을 치운다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 내앞쪽에서 치워진 눈은 필경 내 발 뒤쪽에 다시 쌓일 뿐」인 산골의 집 한 채, 소년을 만나면 항상 길길이 뛰며 반기는 옆집 개 「누룽지」.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이런 사람과 자연의 모습들이다. 무슨 극적인 이야기보다 작가는 이런 이미지들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 속에서 삼례는 떠나고, 낯선 사내가 삼례를 찾아오고, 삼례가 술집 작부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또 다른 여인이 소년의 동생을 데리고 와 내려놓고 도망치듯 떠난다. 마침내 「홍어」라는 별명을 가졌던 아버지도 돌아오지만, 밤 폭설에 발자국만을 남긴 채 어머니는 다음날로 떠나버린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이렇게 찾아오고 떠나지만 작가가 눈송이를 뿌리듯 그려놓은 이미지들은 잔설처럼 읽는 이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작가의 솜씨는 독자들이 차라리 폭설에 파묻힌 채 따뜻한 온기를 즐기고 싶어 하도록 만든다. 단문과 장문의 멋들어진 호흡, 사전을 뒤적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잊혀져가는 고유어휘들의 종횡한 구사, 능청스런 사투리에서 배어나오는 입심, 무엇보다 인간사의 따뜻함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다.

 「홍어」는 「객주」 「화척」 등 대하장편에 힘을 쏟아온 작가 김씨가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이후 꼭 10년만에 발표한 1,000여매 분량의 아담한 전작장편이다. 『아 그래 이런 일도 있었지, 하는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소설 거의가 「길바닥소설」이지만 「홍어」는 유일하게 정착해 있는, 아랫목에 앉아 책갈피를 넘기듯 내 지난 삶을 반추해보는 소설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요즘 횡행하는 소위 이미지소설들(그는 이를 「아파트 7∼8층에 사는 소설」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그의 한마디는 따끔하다. 『젊은 소설들이 자기고백적이고 그러다 보니까 자극적이고 살벌해지고 폭력적으로 되어버린 데 대한 같은 소설가로서의 반성에서 전통적인 삶의 한 모퉁이를 이야기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격정적인 삶으로 그 모든 것이 탕진되는 날, 하나의 무덤이 초원 위에 마련될 것이다. 작가가 그렇다』고 책 서문에서 말한 그는 벌써 우리 나이로 예순이다. 눈이 내리면 생각날 것같은 「홍어」는 김씨가 그 격정을 다스려 그린 한 폭의 수채화이다.<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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