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경제기적 신화 도취/냉철한 현실분석 등한시/거시적 구조개혁위한/구체 프로그램 제시해야” 21세기를 바로 눈 앞에 두고 한국사회가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했다고 자평되던 한국경제는 지난 몇개월 동안 끝없이 추락하여 급기야는 경제주권마저도 국제통화기금(IMF)에 내주어야 하는 굴욕을 감내하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의 「거품」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와 처방이 취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돌연한 위기에 대한 국민들의 당혹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당혹감은 분노와 허탈의 복합감정으로, 그리고 실업과 해고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증폭하고 있다.
이렇게 급작스런 위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과 진단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는 어느 하나의 원인에 따른 결과라기 보다 여러 요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내부개혁이나 정비없이 세계화의 구호에 따라 강행한 시장개방이 무역수지 적자 및 자본 유출입을 확대시켜 외환위기를 낳았다면, 재벌중심의 발전전략은 기술혁신을 도외시한 채 세계경영을 외치면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에 매진하여 위기를 자초했다. 또한, 천민자본주의 문화는 벌써 선진국에 도달한 것처럼 무절제한 소비와 과시적 생활양식을 부추겨 왔다.
한국경제의 이러한 고비용과 저효율은 기술혁신을 꾸준히 이루어 온 일본의 사례나 중소기업을 중시한 대만의 사례와 비교되고 또 구별된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현실분석에 기반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주요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회과학자들이 현실속에 안주하여 그 분석을 등한시해 왔다는 점이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경제의 위기를 예견하는 분석들이 국외에서 빈번히 제시되어 온 것에 반해 정작 국내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한국경제의 「거품」과 「추락」을 우려해 온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목표라면, 최근 전개된 IMF 사태에 대한 사회과학자의 책임 또한 결코 작다고 보기 어렵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과학계는 그동안 경제기적의 신화에 너무 오래 젖어 있었다. 외형적 성장의 과실만을 과대평가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들은 과소평가해 온 것이 한국 사회과학의 맹점이었다. 경제기적의 신화에 스스로 도취된 나머지 정경유착, 차입경영, 과소비와 같은 문제들은 후발산업화 국가의 고도성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통과의례 내지 부산물로 생각해 온 것이 우리의 현주소였다.
예컨대, 국제통화기금이 제시한 재벌개혁이 그동안 소수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에만 제한되어 왔다는 점은 그 단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현재 우리사회가 직면한 경제위기는 결코 단기적인 처방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적인 정치사회 및 천민적 소비문화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거시적인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외환위기, 물가상승, 고용불안과 같은 현안의 해결도 시급하지만 기술혁신, 재벌개혁, 그리고 정경유착 근절 및 건전한 소비문화 정착 등에 대한 구조적인 개혁 또한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이러한 거시적인 개혁 프로그램이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한국경제는 현재의 위기를 단기적으로 모면한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에게는 발등의 불을 끄는 것 못지 않게 먼 산의 불을 진화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사회과학은 이제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거나 변호하지 말고 본래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현실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비판과 성찰이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회과학은 국민으로부터의 무관심을 넘어선 무용론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IMF 시대를 맞아 한국경제는 물론 한국 사회과학도 대단히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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